[이건호 칼럼] 탄소 감축 '대못' 못 뽑나
“과거 탄소 감축 목표를 국제사회에 제시했는데, 국민과 산업계에서 어리둥절해 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6일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오찬 간담회에서 “과학적 근거도 없고 여론 수렴이라든가 로드맵도 정하지 않고 발표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가 작년 11월 제시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40%’(2018년 대비)를 비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어찌 됐든 국제 사회에 약속은 했고 이행해야 한다”고 말해 기업들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녹색성장위 새 출범을 맞아 전 정부가 황당하게 높여놓은 NDC 하향 등 속도 조절을 기대했던 산업계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분위기다. 탄소 저감 기술 개발이 하세월인 상황에서 감축 목표를 지키려면 조업을 단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주요 기업의 탄소 배출량은 전년보다 4.2% 증가해 사상 최대치였다. 간판 기업 삼성전자의 탄소 배출량은 11.8% 늘었다.

NDC를 법제화한 국가는 한국 등 16개국뿐이다. 문 정부가 임기 막판 급피치를 올린 ‘탄소 감축 대못 박기’는 당시 거대 여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지원 속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산업계와 야당의 반대에도 국회는 작년 8월 2030년 감축 목표를 종전 26.3%에서 ‘35% 이상’으로 명시한 ‘탄소중립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문 전 대통령이 ‘최대한 의욕적인 목표 설정’을 주문하자 탄소중립위는 감축 목표를 40%로 올린 안을 내놨고, 10월 27일 국무회의에서 확정됐다. 닷새 뒤인 11월 1일 문 전 대통령은 영국 글래스고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이를 선언했다. 매년 4.2%가량씩 탄소를 줄여야 해 유럽연합(EU·1.98%), 미국(2.81%)보다 연평균 감축률이 높다.

탄소 포집·저장·활용(CCUS) 기술을 활용하면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지만, 비용과 기술 개발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8년 뒤인 2030년까지 상용화는 힘들다. 국내 기업 중 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포스코는 탄소를 내뿜지 않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시기를 2040년으로 보고 있다. 기술이 있어도 고로 9기를 모두 전환하는 데 50조원 넘게 소요된다. 철강·화학·시멘트 3개 업종에서만 탄소 중립 비용으로 2050년까지 최소 400조원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추산(산업연구원)도 나와 있다.

제조업 비중이 높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허황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요 공장을 줄줄이 스톱시킬 수는 없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자국 사정에 따라 파리협정 교토의정서 등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거나 탄소 감축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버틴 사례는 많다. 탄소 중립에 앞장섰던 유럽 각국은 에너지난이 심해지자 석탄화력발전소 재가동을 선언했다. 온실가스 배출량 1·3·4위인 중국 인도 러시아는 자국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탄소 중립 달성 시기를 2060~2070년으로 늦춰 잡았다. 전 정부가 억지로 만든 탄소 제로의 늪에서 새 정부가 왜 허우적거리나.

탄소 중립이 가야 할 길이지만, 이렇게까지 과속할 일은 아니다. 소형모듈원전(SMR) 개발 등 친환경 기술 혁신과 탄소 감축 기술 개발을 위한 규제 완화·세제 지원 확대를 통해 기반을 다지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지금은 ‘생존’이 최우선인 초유의 복합경제 위기 상황이다. 간판을 바꿔 달고 새 출발한 탄소중립녹색성장위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바꾸는 일에 매달려야 한다. ‘잘못된 약속’을 지키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