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발표 100일 관련 건설현장 스케치 - 서울 시내 한 건설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콘크리트 타설공사를 하고 있다.
● 처벌 수위 높아졌지만…일하는 우린 여전히 '불안'

'SPC 계열 빵공장 20대 근로자 끼임 사망사고', '현대프리미엄 아울렛 화재 사망사고'….

지난해를 돌아보면 우리 일터에선 누구라도 기억할만한 큰 사망사고가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영책임자의 처벌 수위를 높인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첫 해인데도 말이죠.

1년 전, 지난해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닻을 올렸을 땐 기대도 있었습니다. 사장님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현장 안전을 더 챙길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죠.

하지만 법의 존립 자체를 무색하게 하는 통계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 '중대재해법' 시행 1년…법 적용 사업장 사망자 오히려 늘었다
작년 9월 화재로 8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에 붙은 작업중지 명령서
고용노동부가 오늘(19일) 내놓은 '2022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을 보면, 지난해 중대산업재해로 숨진 근로자는 644명, 건수로는 611건에 달했습니다.

중대산업재해란 근로자가 업무·작업 도중 숨지거나 크게 다치는 사고를 말하는데요.

중대재해처벌법이 정의하는 중대산업재해는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경우, 또는 같은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하거나 같은 요인으로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 3명 이상 발생한 경우가 해당됩니다.

지난해 전체 중대재해 사망자는 1년 전(683명) 보다 39명(5.7%) 적었는데요.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는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건설업의 경우 공사금액 50억원 이상) 사업장에선 사망자가 256명이나 발생해1년 전 248명 보다 8명(3.2%) 더 많았습니다.

사망사고 건수로 봐도 지난해엔 230건이 발생해 전년(234건)보다 불과 4건(1.7%)이 줄어들었을 뿐이었죠.

지난해 해가 시작되자 마자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해서 근로자가 숨지면 '사업주' 또는 '경영 책임자'를 직접 처벌하는, 그것도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이라는 아주 '센' 처벌 수위에도 사망자가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중대재해법의 역설…처벌 세졌는데 사망자 더 늘었다? [전민정의 출근 중]
● 사장님 처벌 피하는 데만 급급…취지는 '퇴색'

뭐가 문제였을까요. 일단 정부 관계자와 업계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지난해 같은 경우는 대형 사고가 잦았던 영향이 물론 컸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있었습니다. 막상 현장에선 사고를 예방하는 데 신경쓰기 보다는 당장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입증하기 위한 서류작업에 집중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겁니다.

실제 대기업 등 자금 여력이 되는 곳들은 CEO(최고경영자) 등 경영책임자가 처벌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형 로펌에 자문을 맡기거나 관련 전문가, 관료까지 영입해 법 망을 피하는 데 더욱 열심이었다고 하죠.

서류 작업이 많아지다보니 정작 시간과 비용,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하는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조치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다 챙길 여유도 없고 여건도 취약한 중소기업의 경우 더 심하게 나타났고요.

또 법 시행 1년이 지나도록 처벌 판결 사례가 없었다는 점도 법에 대한 긴장도를 떨어뜨린 요인이었다는 지적입니다.

정부는 지난 1년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인 중대재해 229건 중 34건을 검찰에 송치했는데, 이 중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11건(4.8%)에 불과하고 나머지 117건은 수사 중 입니다. 아직 1심 판결이 나온 것 조차 없는 겁니다.

고용부 관계자는 "빨리 기소가 되고 판결되는 사례가 나오면 전반적으로 기업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컸을 텐데 수사가 장기화되다 보니 그렇지 못한 측면이 컸다"고 설명했습니다.

수사가 더딘 건 중대재해법에서 요구하는 사고 인과 관계를 확인하는 데 서류 확인과 현장 조사 등 해야할 작업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안전보건 관리체계 전반을 살펴봐야 하는데 고용부 내에서는 한정된 수사 인력으로 역부족이라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 '자율 예방'으로 방향 튼 중대재해법, 이것부터 지켜져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해 11월 30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렇듯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에 의문이 계속 제기되자 정부는 지난해 11월말,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통해 정책 방향을 '처벌과 규제' 중심에서 '자율적인 예방과 엄중 처벌' 중심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노사가 함께 스스로 위험 요인을 점검하고 개선하는 자기규율 예방 체계가 현장에 정착될 수 있도록 감독 체계를 바꾸고 산업안전 교육도 강화해 나가겠다는 건데요.

전문가들은 당장 처벌을 피하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기업 스스로 안전조치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처벌 대상'부터 명확히 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형사처벌을 하려면 문제 되는 행위의 기준이 명확해야 당사자로서도 예상을 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소기업에 대해선 안전체계 보완을 위한 직접적인 지원을 늘리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내 노사현장에서 다소 유토피아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만들어지면 중대재해 발생은 훨씬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보통 산업재해 등 안전사고는 임단협 시기에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노사관계가 안좋을 수록 현장에서 사고가 더 많아졌다는 건데요.

기업이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투자를 불필요한 비용과 부담이 아닌 당연한 지원이나 투자로 인식하고, 또 근로자도 노사간 불안이나 대립 없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할 때 비로소 산업 현장의 안전도 보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민정기자 jmj@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