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항아리처럼 다 비우고 둥그런 새 꿈 담아보세요
이것은 하늘위에 뜬 흰 달이 아니다.
이제 막 산 봉우리에 올라
은하수 물을 길어 오는 백옥의 사발
정화수 보다 맑은 흙과 불의 기도

도공의 가슴이 가마(㬿)가 되고
시인의 열정이 불길이 되어
천 번의 밤이 지나도 기울지 않은
달이 되었다.

청화가 파란 호수가 되고
진사가 저토록 고운 노을이 될 줄이야.
도공도 미처 몰랐던 그 많은 색깔들은
모두다 어디에 두고
교교한 달빛만이 남았느냐.

얼마나 간절한 비원이었기에
땅속에 묻어둔 천년의 침향(㟃䅏)이
지금에서야 깨어나 저리도 향기로운가.
달 항아리가 몰래 속마음을 보여주네
백자 사발.

- 2010년 가을, 도예가 신경균의 작품을 보며 고(故) 이어령 선생이 쓴 시. -
12월의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많은 생각과 기억들이 스쳐 가는 시간입니다. 올 한 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찔했던 기억, 소중했던 인연까지 모두 각자의 역사를 가슴속에 하나씩 새겨보는 때입니다.

이런 날엔 순백의 달항아리를 떠올려 봅니다. 담담하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둥근 달항아리. 우주의 한 조각을 떼어내 도예공이 수많은 밤을 불과 싸워 만들어냈을 그 신비한 모습. 매끈한 표면에서 오묘한 빛을 뿜는 거대한 달항아리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고 푸근한 마음을 먹게 합니다.

텅 비었지만 꽉 차 있는 한국의 달항아리는 수많은 예술가가 사랑했습니다. 수화 김환기 화백은 “내 예술은 백자 달항아리에서 나왔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라고 했고, 미당 서정주 시인은 평생 난초와 조선백자를 바라보며 시를 썼습니다.

중국의 도자기가 듬직하고, 일본의 도자기가 아기자기하다면 한국의 도자기는 가냘픈 선이 참 아름답습니다. 1300도의 뜨거운 가마 속에서 구워지는 달항아리는 윗동과 아랫동을 따로 만들어 붙인답니다. 두 개의 사발을 하나로 이어 붙여 어떤 것은 원형으로, 어떤 것은 뚱뚱한 타원으로, 어떤 것을 날씬한 타원으로 탄생합니다.

도예가는 가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형태를 만질 수 있으니, 나머지는 온전히 ‘불의 일’입니다.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어떤 힘’에 그저 맡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달항아리는 불규칙 속에서의 규칙, 미완성 속에서의 완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처럼.

꼭 완벽한 형태의 달항아리만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전통 도자기 도예가인 장안요의 신경균 작품이 그렇습니다. 터지고 찌그러지고 얼룩진 달항아리는 마치 자연이 그린 수묵화처럼 느껴집니다.

올해 ‘웨이브’ 마지막 회는 300년 넘게 전통 가마로 백자를 만들고 있는 경북 문경의 영남요 풍경을 담았습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가마 옆에서 82세의 장인은 오늘도 9시간씩 물레질을 합니다. “달항아리는 모든 도공의 꿈”이라고 말하는 그. 어쩌면 백발의 도공은 흙을 빚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을 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 비우고 또 자연스럽게 채워가는 우리의 삶을 기원합니다. 둥그런 새해 맞이하시기를.

김보라 기자/문경=오현우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