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재건축 정비구역 내에서 전세로 사는 직장인 K씨. 조합에서 이주 기간을 공고했지만 이주 기간에 맞춰 이사하지 못했다. K씨는 조합의 독촉에 뒤늦게 이사할 집을 알아본 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고서야 다른 동네로 이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K씨는 법원으로부터 소장을 송달받았다. 놀란 마음에 확인하니 재건축 조합이 K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이었다. 조합은 K씨를 비롯한 다른 세입자에게도 수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과연 K씨는 조합에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일까. 이와 비슷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을 소개한다.
서울 강남구의 A재건축 조합은 이주 기간을 정해 공고한 데 이어 현금청산자들을 상대로 매도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조합으로부터 ‘매매대금을 지급받음과 동시에’ 부동산에 관한 소유권이전등기 및 인도 의무를 이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그 후 조합은 판결에 따라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 제공 및 인도와 동시 이행으로 매매대금을 받아 갈 것을 독촉(최고)한 후 이를 공탁했다.
A조합은 현금청산자와 세입자들을 상대로 ‘불법 점유로 인해 공사 지연’으로 사업비 및 이주비 대출이자 합계 6억여원을 지출하는 손해를 입게 돼 피고들에게 이에 대한 공동불법행위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A조합의 청구는 ‘관리처분계획의 인가고시가 있는 때에는 종전의 부동산을 사용·수익할 수 없다’는 도시정비법의 규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조합이 관리처분계획을 인가받고 이주를 공고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원칙적으로 이사하지 않은 세입자 등은 공동불법행위자로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법원은 피고들이 조합으로부터 매매대금을 받지 못한 기간만큼은 부동산의 인도를 거절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봤다. 이와 함께 다른 현금청산자와 세입자들이 사업 구역 내 부동산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조합은 피고들 때문만이 아니라더라도 철거 공사에 착수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또 철거 공사가 가능할 정도로 물리적, 지리적으로 부동산이 구분된 상태라고 볼 만한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세입자의 경우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반환받을 때까지
부동산의 반환을 거절하고 계속 살 수 있으므로 세입자들이 부동산을 계속 점유한 것을 두고도 불법 점유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입자들은 도시정비법 제8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손실보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법원은 재건축정비사업 시행자의 상가 임차인에 대한 보상 의무 규정이 없는 점, 주택재건축사업은 주택재개발사업에 비해 공공성 및 공익성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점 등을 종합해 법률에서 규정한 손실보상은 재건축정비사업의 임차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결국 A조합의 손해배상청구는 피고의 불법 점유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고, 세입자는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받을 때까지 부동산 인도를 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합의 패소판결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고형석 법률사무소 아이콘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