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극작가 겸 연출가 티아구 호드리게스 /국립극장 제공
포르투갈 극작가 겸 연출가 티아구 호드리게스 /국립극장 제공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은 지난해 차기 예술감독으로 포르투갈 극작가이자 연출가 티아구 호드리게스(45)를 위촉했다. 1947년 페스티벌이 시작된 이래 프랑스 국적이 아닌 예술가가 예술감독을 맡는 것은 호드리게스가 처음이다. 20대부터 유럽 주요 무대에서 특유의 문학적 상상력과 시적 감각으로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여온 그의 예술 세계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세계 공연예술계가 주목하는 호드리게스의 대표작 ‘소프루(sopro)’가 오는 17~1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 무대에 오른다. 포르투갈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이 제작해 2017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연극과 연극을 창조하는 이들에 대한 강렬한 헌사”(르 피가로), “솟아나는 생명력을 뽐내며 아름다움과 지성을 보여주는 공연”(르 몽드) 등의 찬사를 받았다.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초연 출연진과 제작진이 그대로 내한해 포르투갈어로 공연한다.
호드리게스 '소프루'…연극과 극장의 소중함을 일깨우다
‘소프루’는 포르투갈어로 ‘숨’‘호흡’을 뜻한다. 지난 10일 국립극장에서 영어 자막 영상으로 미리 본 작품은 공연 초반부터 왜 제목이 ‘소프루’인지 짐작게 한다. 폐쇄된 극장 내부처럼 보이는 무대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연극 대본을 들고 등장한다. 손짓으로 배우들을 불러내고 그들에게 다가가 숨을 불어넣듯 나지막이 속삭인다. 배우들은 이 여자를 마치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취급하지만, 그가 불어주는 대사를 그대로 읊고 연기한다.

공연은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을 일러주는 ‘프롬프터(Prompter)’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포르투갈에서 40여 년 동안 현역 프롬프터로 활동해온 크리스티나 비달이 직접 출연한다.

호드리게스는 2010년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 소속 극단의 연습 장면에서 비달의 모습을 눈여겨봤다. 2015년 이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비달의 인생을 담은 작품을 쓰겠다고 제안했고 직접 출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배우가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치는 비달을 무대에 세우기까지 2년이 걸렸다.
호드리게스 '소프루'…연극과 극장의 소중함을 일깨우다
이런 승강이와 설득 작업이 무대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극은 한 편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달의 ‘극장 인생’을 허구와 실재,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으로 보여준다. 비달은 약 12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프롬프터처럼 대사를 불러주고 연기를 지켜보며 자신의 인생을 연출한다.

극 중 연출가는 프롬프터를 인명구조요원에 비유한다. 허구의 둑과 실재의 둑 사이에 흐르는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배우를 건져내 숨을 불어넣는 게 프롬프터가 할 일이다. 체호프의 ‘세 자매’, 라신의 ‘베레니스’ 등을 공연할 때 비달이 겪은 '인명 구조 사건'들을 중심으로 극장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생사가 촘촘하게 엮이며 웃음을 유발하고 눈물을 자아낸다.
티아구 호드리게스 대표작  '소프루'. /국립극장 제공
티아구 호드리게스 대표작 '소프루'. /국립극장 제공
연극은 ‘기억의 예술’임을 일깨울 공연이다. 안치운 호서대 연극학과 교수는 “연극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예술,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밝혀주면서 지속하는 예술”이라며 “기억의 매체 같은 말과 글과 몸이 한곳에 모여 연극을 이룬다”고 했다. ‘소프루’는 인생의 대부분을 극장에서 보낸 비달의 기억을 무대에 끄집어내, 잊혀 가는 연극 문화와 극예술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고,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타인을 위해 일하며 행복과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무대에서 내내 숨만 불어넣던 비달이 마침내 객석을 향해 직접 목소리를 내는 순간의 감동이 꽤나 묵직하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