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금융·의료 종사자 수십만명 '엑소더스'
[우크라 침공] '이웃과 전쟁 싫어' 러시아 떠나는 고급인력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에서 수십만명의 고급 인력이 고국을 떠났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비영리 단체 '오케이 러시안즈'는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30만명의 인력이 러시아를 떠난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주로 IT(정보기술), 과학, 금융, 의료 종사자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터키 등지로 향했다고 WSJ은 전했다.

앞서 러시아 통계청은 2020년 러시아를 떠난 인구가 50만명이라고 집계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인력이 러시아 경제를 이끄는 핵심이라는 점이다.

국제금융협회(IIF) 관계자는 "러시아에서 출국했거나 출국을 계획 중인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젊은 세대"라면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달 말 기준으로 러시아에서 최근 급부상한 분야인 IT 산업에서만 5만∼7만명이 이미 고국을 등진 것으로 집계됐고 이달 중에는 10만명이 추가로 떠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이 중 일부는 아예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이전하거나 동료와 동반 출국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유치원생 수학 공부 앱을 공동 개발한 사샤 카질로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했는데, 앱 개발자 15명가량을 포함해 사업체도 이전할 계획이다.

그는 남편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다 13일간 구금된 것이 출국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WSJ에 말했다.

그는 "모든 게 악몽이었고, 우리는 깨어나야만 했다"면서 "전쟁 전이라면 나도 러시아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환상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항공사인 아예로플로트에서 부사장을 지낸 안드레이 파노프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열흘 만에 사직서를 내고 러시아를 떠났다.

이스라엘에 머무는 중이라는 그는 "국영 기업에서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 IT 기업인 얀덱스에서는 최고경영자(CEO) 엘레나 부니나가 임기 만료를 2주 앞두고 조기 사임하면서 "이웃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사내 공개 메시지를 띄웠다.

이어 프로그래머를 포함해 수십명의 얀덱스 직원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가뜩이나 서방의 제재 등으로 러시아 경제엔 먹구름이 드리운 상태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올해 러시아 경제가 10% 역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러시아에서 이같은 규모의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진 것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고등 교육 중산층과 고위층 등 수백만명이 러시아를 떠난 이후로는 처음이 될 수 있다고 학계는 분석했다.

시카고대 교수인 콘스탄틴 소닌은 "초기 엑소더스가 불과 몇주 사이에 일어났다"면서 "러시아에서 이런 집중적 이민 행렬이 나타난 것은 100년 만"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