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법정으로, 이젠 데이터로'…노사관계의 미래
#영원할 것만 같던 글로벌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재계 순위는 비제조업, 비전통적 산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세대교체라는 격변기를 맞이했지만 노사관계만은 답보 상태다. ‘투쟁’, ‘올해도 파업’, ‘여전한 입장 차’, ‘극심한 대립’ 등 분야를 막론하고 노사갈등을 표현하는 꼬리표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무력 투쟁은 법적 쟁송으로 그 방식이 다소 변하긴 했지만 대립적 노사관계의 틀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 하에서 힘을 통한 투쟁, 혹은 법정에서의 싸움과 대응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김&장법률사무소의 노사관계 전문가 3명이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제목은 '노사관계의 미래', '거리에서 법정으로, 이젠 데이터로!'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책은 수십년째 지속되고 있는 대립적 노사관계의 양태와 그 해법을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세 명의 저자 중 서덕일 변호사는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실을 거쳐 현재 김&장법률사무소에서 글로벌 기업의 노사관계, HR제도, 컴플라이언스 관련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변양규 박사는 한국경제연구원 거시연구실장 및 노동시장연구TF팀장을 거쳐 김&장법률사무소 전문위원을, 우광호 박사 역시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노동시장과 노동법 변화를 연구하다 지금은 김&장법률사무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국내 최고 수준의 노동법·노사관계 전문가입니다.

저자들은 집필 배경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과연, 무력투쟁과 법적 쟁송만이 능사일까? 후진적 노사관계를 타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라고 자문합니다. 그러면서 "노사관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선순환 구조로 전환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집필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이 한국 기업들의 노사관계 지향점 또는 벤치마킹으로 삼은 대상은 일본과 독일입니다. 책 내용을 잠시 소개합니다.

#일본 노사관계의 핵심은 생산성 원칙이었다. 굴지의 기업들이 외국에 인수되고 직원들이 대거 해고되는 모습을 보며, 일본 국민들의 안정적인 일자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다. 노사관계에서도 무리한 요구보다 철저히 생산성에 근거한 임금인상 요구와 결정이라는 원칙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노조는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정확한 요구수준을 산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얼마 전 일본 도요타자동차 노조가 2022년부터 일률적인 임금인상 대신 전 조합원을 직급·직종별로 세분화해 임금인상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노사 간 불필요한 논쟁은 걷어내고 생산성에 근거해 유능한 인재에게는 더 보상해야 한다는 노조의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독일 자동차산업의 노사관계에서 금속노조(IG METALL)의 임금협상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협력의 원칙과 실제 수행한 것에 대한 급여 지급의 원칙이다. 이 원칙 하에서 임금인상 요구율을 설정하기 위해 한스 뵈클러 연구소(HANS B?CKLER INSTITUTE) 등과 같은 경제연구소 뿐만 아니라 학계 전문가 및 내부 전문가의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거시경제적 환경을 파악한다. 또한 효율적 합의를 위해 산별 교섭에서는 근로조건의 최저 수준만 결정하는 대신 개별 기업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기 위한 제도적 유연성도 함께 추구한다. 결국 임금은 노사간 협상을 통해 결정되고, 그 협상은 반드시 기업이 처해 있는 환경을 고려해야만 수긍 가능한 협력의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일본과 독일, 두 선진사례의 공통적인 핵심은 생산성과 연동한 합리적 임금 결정"이라며 "명확한 근거와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고 제시하던 임금인상안과 그 인상안에 대한 거부, 그로 인한 대립의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사측을 향해서는 "노조를 향해 깃발을 내리라고 종용하기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며 "노조가 전문성을 가질 수 있도록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조언합니다.

노사 양 쪽을 향한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과 정상빈 현대자동차 부사장의 추천사도 눈길을 잡아두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디지털 대전환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나라가 살아남는 길은 우리 아들 딸들에게 일자리 희망을 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노조는 이기심을 버리고, 회사는 편한 길을 버려야 한다"(이기권 전 고용부 장관)
"승리와 패배가 아닌 노사 모두가 성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무력 투쟁이나 법적 대응이 아닌 분석을 바탕으로 한 명확한 데이터를 통한 선순환의 대립을 하자는 의견에 큰 지지를 보낸다"(정상빈 현대차 부사장)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