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는 101년이지만, 고고학 조사 결과로는 5세기 초반 완공
"성벽 조성 전부터 취락은 있었을 것"…"기록 새롭게 볼 계기"
삼국사기보다 250년 늦은 월성 축조 시기, 어떻게 봐야 할까
"파사왕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
역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파사왕 22년은 서기 101년. 경주 월성은 이 문헌을 근거로 신라가 망한 935년까지 800년 넘게 왕이 거주한 왕성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월성에는 흔히 '신라의 천년 왕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월성 서성벽 발굴조사 성과를 공개하면서 성벽은 4세기 중엽에 쌓기 시작해 5세기 초반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연구소는 "월성 축성 기록은 실제 축조 연대보다 많이 앞당겨진 것으로 여겨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고고학 조사 결과와 문헌 간에는 약 25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날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녹화된 영상을 통해 "월성은 1천700여년 전에 만들어져 600년간 사용됐다"고 말했다.

월성 조성 시기는 4세기라는 생각을 공식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고려시대인 1145년 간행된 삼국사기의 삼국시대 초기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일제 학자들은 아예 삼국사기 불신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초기 기록에 나오는 사건은 실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시기는 긍정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삼국사기보다 250년 늦은 월성 축조 시기, 어떻게 봐야 할까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신라가 월성을 축성했다는 사실은 신뢰할 수 있지만, 101년이라는 기록은 신라의 발전 속도를 검토했을 때 조정해야 할 듯하다"고 말했다.

이어 "서성벽에서 나온 토기와 시료, 해자에서 확보한 유물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4세기 중반 착공, 5세기 초반 완공이 확실시된다"며 "다른 지점도 추가로 조사해야 하겠지만, 시간 차이가 아주 크게 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다만 최 교수는 신라가 너비 40m·높이 10m인 거대하고 정교한 토목 구조물을 만든 시기는 4∼5세기이지만, 월성에는 이전부터 취락이 존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월성의 토층을 살폈을 때 아마도 2세기 후반에는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이 형성돼 있었을 것"이라며 "방어취락이 토성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4세기 중엽은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병합해 신라로 나아가는 시기로, 각지에 토성과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 들어섰다"며 "고고학 성과와 문헌이 같은 흐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50년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살피기보다는 왜 신라인이 101년에 월성을 쌓았다고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삼국사기를 새롭게 볼 계기가 됐다고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는 290년 월성이 홍수로 무너졌고, 487년 월성을 수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5세기 후반 월성에서는 대규모 보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전 주무관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의 차이는 결국 조사를 확대하면서 풀어야 할 과제"라고 짚었다.

삼국사기보다 250년 늦은 월성 축조 시기, 어떻게 봐야 할까
한편 월성 서성벽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인신공양) 흔적에 관심이 집중됐지만, 연약한 지반에 말뚝을 박고 각종 식물을 층층이 깔아 기초부를 조성한 뒤 볏짚·점토 덩어리 등을 차곡차곡 올린 축성 과정도 중요한 학술 자료로 평가됐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월성을 세울 당시 풍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신라의 행정운영 체계를 탐구하고, 백제 풍납토성 성벽과 비교하면 소략한 문헌 기록을 넘어 역사의 실체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