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스무고개
‘라떼는~’ 미대를 간다는 것은 부모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부모를 설득해 미대를 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화가는 굶어 죽는다는 인식은 기본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고까지 생각하는 게 당시 부모세대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다른 화가들을 알 리도 없었겠지만 자식들 말리기엔 딱 좋은 대표적 케이스가 이중섭과 고흐였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인생을 자식들이 따라간다는데 좋아할 부모는 없으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이중섭이나 고흐 때문에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일찍 붓을 꺾은 아이러니였다. 나 역시 그런 첫 번째 고개를 넘고 미대를 간 경우라, 작품은 몰라도 인생은 절대 그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79학번인 나의 입시 시절엔 예비고사라는 게 있어서 본고사를 치기 전에 희망학과나 대학을 가늠한 뒤, 두 달을 더 열심히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고 그랬다. 예비고사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비교적 안전한(?) 미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미대는 성적이 좀 떨어지는 학생들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그런 시선이 있다는 걸 느꼈고 그 편견을 바꾸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그들과 똑같이 노력했다. 게다가 그림만 하나 더 얹어진 경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약속시간 늦지 않기’ ‘술 취하지 않기’ ‘대화에서 자신감 갖기’ 등을 꾸준히 실천했다. 사실 당시의 화가들은 그런 경향이 있었다. 시간을 초월해서 살기도 하고 술에 기대어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기도 했으며, 일반 사람들과 소통을 잘 안 하는 게 다반사였으니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내려보지 않고 마주 보는 눈높이로 모임에 초대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또 몇 개의 고개를 넘었다.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할 때 나는 흥미로운 그림책 한 권을 들고 간다. 자리에 앉으면 “미술에 관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먼저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화가의 삶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친절한 수동씨’가 되어 즐겁고 재미난 그림책을 보여주듯 궁금증과 호기심을 풀어줬다. 그러면 기대 이상으로 미술세계에 한 발씩 더 다가오는 게 눈에 보였다. 이제는 경사가 심한 고갯길도 넘는 일이 점점 수월해짐은 물론이고 즐거워지고 있다. 두 달간 이어진 이번 에세이 연재도 같은 맥락이다. 4~5명이 모이는 자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독자가 읽는 거라 긴장은 됐지만, 다듬고 또 다듬은 그림책 하나를 보여주듯 열심히 이야기를 풀었다. 또 그렇게 한 고개를 무사히 넘었다. 여러 질문과 대답을 거듭해 스무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정답이 나오는 것처럼, 앞으로 몇 고개를 더 넘으면 나도 내 그림도 빛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감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