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다.”

인드라니 라자 싱가포르 재무부 차관이 지난해 1월 전격 시행한 ‘가변자본기업(VCC: variable capital companies)’ 제도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VCC 제도는 한마디로 펀드에 ‘조세피난처급 혜택’을 주는 정책이다. 펀드 운용회사의 설립 및 운영 비용 조건을 낮추고, 주주총회 개최와 재무제표 공개 요건도 완화했다. 과거 룩셈부르크와 아일랜드, 케이맨제도에서 얻을 수 있던 혜택을 아시아 금융중심지로 옮겨놓았다는 평가다.

싱가포르가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꼽히지만 이처럼 파격적인 정책을 도입하려면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일반인의 삶과 동떨어진 글로벌 운용사 또는 슈퍼리치 가문의 자산관리회사(SFO: single family office)에 직접적인 이득을 주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빈부격차가 큰 나라 중 한 곳이다. 세수를 늘려 빈곤층 지원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부 갈등만 키우는 ‘악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정책을 자신있게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VCC는 반드시 싱가포르인을 이사로 두도록 하고 있다. 자산관리인과 회계사도 현지인을 고용해야 한다. 겉으로는 글로벌 기업들에만 혜택을 주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철저히 실리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설계자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영향을 미친 리콴유 초대 총리의 실용주의 전통을 잇는 정책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가적으로 이득이라면 논란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싱가포르의 실용주의 정책은 오랜 자랑거리인 완전고용과 1인당 6만달러를 웃도는 국민소득을 성취한 핵심 비결이다. 싱가포르의 실업률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2% 안팎에 머물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까지 이른바 ‘마찰적 실업’만 존재했다는 얘기다.

글로벌 펀드산업의 지형을 바꾸겠다며 야심차게 내놓은 VCC 제도 역시 벌써부터 일자리 창출 효과를 증명하고 있다. 금융당국인 싱가포르통화청(MAS)에 따르면 작년 말까지 약 1년 동안 160여 곳의 VCC가 새로 생겼다. VCC 제도를 활용하려는 SFO도 꾸준히 밀려들어 오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영국의 다이슨 가문 자산관리회사를 비롯해 2019년 말 현재 약 200개의 SFO가 있다. 2017년에서 2019년 사이에 무려 다섯 배로 늘어났다.

글로벌 운용사를 유치해 고급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은 과거 한국도 추진한 경험이 있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 출범 직후 금융중심지 모델을 국정과제로 선정한 때였다. 노 전 대통령은 “고학력 인력 때문에 금융·법률·회계 같은 서비스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일자리 창출을 금융허브 추진의 핵심 배경으로 꼽았다.

하지만 야심찬 계획은 2006년 미국계 사모펀드(PEF) 론스타의 ‘먹튀’ 논란을 계기로 장기간 표류하고 만다. 세금 한 푼 안내고 폭리를 취하는 외국자본을 향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분노를 더욱 자극해 표심을 얻으려 했다. 결국 세무 조사와 검찰 수사가 뒤따랐고 많은 ‘고급 일자리’가 다른 나라로 발길을 돌렸다. 대기업에 혜택을 줘 일자리를 늘리는 일도 더욱 어려워졌다. 론스타 사건은 정경유착 논란을 가져올 만한 정책을 회피하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을 낳았다.

정부가 최근 재정을 이용한 공무원과 노인 일자리 만들기에 집중하는 것도 이 같은 책임 회피 관행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싱가포르처럼 기업활동을 돕는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보다 부담이 적고 통계적인 성과도 빨리 얻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도 1조3200억원을 들여 노인 일자리 80만 개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기업의 투자 확대와 이익 증가 없이는 고용시장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일자리 예산은 지난해 26조원에 달했지만 취업자 수는 22만 명 급감했다.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한국의 고용시장은 최악의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 숀 로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세계경제연구원 세미나에서 비정규직 일자리와 자영업자의 심각한 타격을 언급하면서 “한국 고용시장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한국만의 실용적 정책 수립과 추진이 필요하다.

성장 속도 빨라지는 싱가포르 자산운용업

싱가포르 자산운용업의 성장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싱가포르 중앙은행 겸 금융당국인 통화청(MAS)이 최근 발표한 연례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있는 운용사들의 운용자산(AUM) 총액은 2019년 말 기준 3조9770억싱가포르달러(약 3300조원)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15.7% 증가한 규모다. 2018년 운용자산은 3조4370억싱가포르달러로 전년보다 5.4% 늘었다.

MAS는 “아시아 지역에 투자하려는 전략적 선택과 양호한 성과가 싱가포르 운용자산 증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싱가포르 기반 운용자산의 69%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투자하고 있다. 동남아 투자가 2018년엔 0.4% 증가에 그쳤으나 2019년 22%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태 지역 전체의 37%를 차지했다.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강행으로 격화된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도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다. 중국의 홍콩 통제 강화와 미·중 갈등 심화를 우려한 일부 운용회사들이 싱가포르로 자산을 옮긴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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