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국엔 없는 공인·공동인증서
뉴욕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장만한 게 하나 있다. 바로 지갑이다. 한국에선 필요 없었다. 휴대폰 하나로 대중교통 이용은 물론 대부분의 소비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여러 장의 카드와 현금을 들고 다닌다. 시내에 주차할 땐 동전이 꼭 필요하다. 대형마트에서 휴대폰으로 결제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미국을 아날로그 사회라고 단정해선 안 된다. 금융부문만큼은 한국보다 훨씬 빠르고 소비자 친화적이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면 간단한 아이디나 지문으로 대부분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한국처럼 PC나 휴대폰에 각종 보안 프로그램 및 인증서를 깔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거추장스러운 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 장치를 들고 다니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편리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금융 관련 스타트업이 쏟아지는 배경 중 하나다. 온라인 증권 거래 앱인 로빈후드만 해도 아이디나 지문만으로 다른 은행 입·출금까지 일사천리로 처리된다.

공인인증 폐지하니 금융인증서

그렇다고 보안이 허술하지도 않다. 등록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카드 결제를 시도하면 자신도 모르게 사용 제한이 걸릴 수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이상 행태를 감지해서다.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소비자 상담센터에 전화해 제한을 풀어야 한다. 이때는 상담원에게 본인 외에 결코 알 수 없는 답을 줘야 한다. 초등학교 때 길렀던 반려견 이름 등이 대표적이다. 계좌 개설 때 직접 등록해 놓은 그 질문이다. 금융 사고가 터지면 손해 보는 쪽은 금융회사일 가능성이 높다. 고객이 사기당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배상해줘야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공인인증제도가 최근 폐지됐다. 전자서명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다. 제도가 도입된 지 21년 만이다. 반가운 마음에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봤다. 여전히 키보드 보안 등 각종 프로그램을 4~5개 깔도록 요구했다. 과거의 공인인증서는 ‘공동인증서’ 또는 ‘금융인증서’란 이름으로 대체돼 있었다. 금융권이 공동으로 3중·4중의 보안 장치를 만들어 놓고 사고가 터지면 고객 책임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그대로였다.

복잡한 인증은 비단 금융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 상품을 구입하는 건 더욱 까다롭다. 정부는 2014년 국내외에서 방영됐던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천송이가 입었던 코트를 해외 소비자들이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액티브X 등 보안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달 초 공인인증서 폐지와 함께 6년 만에 ‘천송이 코트’의 해외 판매가 가능하게 됐다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한국선 휴대폰 없으면 낭패

국내 유명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봤다. 애초 회원 가입을 하지 않으면 첫 단계를 넘어갈 수 없었다. 회원 등록을 하려니 ‘010’으로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를 넣으라고 요구했다. 이게 없으면 아이핀 인증이 필수였다. 아이핀 인증을 받으려면 다시 한국 내 휴대폰 번호나 공동인증서가 필요했다. 75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는 물론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도 구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반면 한국인들은 클릭 몇 번으로 미국 내 온라인 상점에서 자유롭게 물품을 구입하고 있다. 지난달 말 블랙프라이데이 때 유명 음향 제품이 수시간 만에 동 난 것도 한국인의 구매력 덕분이었다.

공인인증서가 공동인증서로 대체됐다는 소식에 뉴욕 금융권 관계자는 “공인인증서나 액티브X 잔재는 코로나19처럼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게 ‘IT(정보기술) 강국’ 한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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