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부동산 공인중개업소 밀집지역. /뉴스1
서울시내 부동산 공인중개업소 밀집지역. /뉴스1
30대 직장인 한모 씨(34)는 최근 서울 영등포구 신도림동에서 전세를 낀 1층짜리 아파트 매물을 계약했다. 한 씨는 서울 집값이 워낙 많이 올라 앞으로 내 집 마련을 못할까봐 우려하던 중 실투자금이 크지 않은 전세 낀 매물을 발견했다. 매매가와 전세가격 사이의 갭은 1억원 정도 였다. 전세가격 오름세가 집값 상승세보다 더 가팔랐기 때문에 이 매물을 살 수 있었다. 한 씨는 “중개업소에서도 최근 전세금이 너무 올라 매매가 대비 비중이 크게 놓아졌다며 매매와 전세를 동시에 진행하라고 권했다”며 “당분간은 전세를 놓고 자금을 모은 다음 추후에 들어가서 살 계획”이라고 말했다.

6·17 부동산대책으로 갭투자 규제가 강화됐지만, 투자자들은 물론 실수요자 사이에서도 되레 갭투자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갭투자를 막기 위해 대출을 옥죘지만 새 임대차법 이후 전셋값이 폭등하면서 굳이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매값과 전세가격 사이의 갭이 줄어서다. 정부의 잇따른 대책이 결과적으로 갭투자를 부추기는 모양새가 됐다.

전세 품귀현상에 갭투자 수요↑

서울은 물론 수도권까지 전세 품귀현상이 번지면서 현지 중개업소에는 갭투자 문의가 몰리는 중이다. 특히 서민들이 주로 사는 서울 외곽지역의 구축이나 중소형 아파트를 중심으로 갭투자가 늘고 있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위치한 청백3단지 전용 49㎡는 지난 8월 말 1억9500만원에 전세 거래됐다. 비슷한 시기에 이 집이 팔린 가격(2억2500만원)과 비교하면 매매가와 전세가격 사이의 격차는 3000만원에 불과했다. 지난 7월 강서구 화곡동에서 4억원에 미성아파트 전용 84m²(2층) 아파트를 산 집주인도 비슷한 경우다. 두 달 만에 전셋값이 오르면서 지난달 3억9000만원에 세입자를 받았다. 실투자금은 1000만원 밖에 들지 않은 셈이다.

수도권에서는 전세가격이 매매가보다 더 상승해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까지 나오는 중이다. 깡통전세는 통상 집값 하락기에 매매가격이 1~2년 전 전세가격 아래로 떨어져 발생한다. 최근엔 전셋값이 더 많이 올라 깡통전세가 나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주로 경기 파주나 시흥, 남양주 등지에서 전세가가 매매가보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더 비싼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일대 구축 아파트 단지.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일대 구축 아파트 단지. 연합뉴스
이같은 조짐은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지난달엔 서울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51개월만에 반등했다. KB국민은행 리브온에 따르면 지난 9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은 53.6%로 전달(53.3%) 보다 0.3%포인트(p) 올랐다. 이로써 지난 2016년 6월 75.1%로 정점을 찍고 줄곧 하락하던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이 51개월 만에 오름세로 돌아섰다.

최근 전세가율 반등은 서울뿐 아니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전역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경기도 아파트 전세가율은 9월 69.9%로 7월(68.5%)을 최저점으로 8월 68.7% 등을 기록하며 2개월 연속 올랐다. 인천 아파트 전세가율도 9월 71.4%로 전월(71.0%) 보다 0.4%p 뛰면서 반등했다.

임대차법 때문에 "졸지에 갭투기꾼 돼"

전문가들은 임대차법 시행이후 전세 매물 품귀와 전셋값 급등으로 이러한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그동안 수차례 대책을 내놓으면서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갭투자를 정조준했다. 대출 봉쇄 등을 담은 특단의 조치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세 공급이 줄고 매수 심리가 위축되면서 전셋값이 폭등하면서 오히려 갭투자를 조장하고 있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이같은 현상은 임대차법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다.

특히 구매력을 갖춘 맞벌이부부나 전문직 등 젊은 세대 상당수는 가점이 낮아 '로또 청약'에서 소외됐다. 전세 매물도 사라지면서 갭투자를 통해 내 집 마련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입주한 서울 시내 주요 아파트 단지 전세금은 아예 분양가격을 웃돌고 있다. 은평구에서 지난 6월 입주한 DMC롯데캐슬퍼스트 전용면적 84㎡는 지난달 9일 보증금 6억원에 전세계약이 이뤄졌다. 분양가는 5억6000만원으로 그보다 4000만원이나 낮다.
서울시내 부동산 공인중개업소에 전세 매물 정보란이 대부분 비어있다. /뉴스1
서울시내 부동산 공인중개업소에 전세 매물 정보란이 대부분 비어있다. /뉴스1
임대차법 시행으로 세입자의 ‘2+2년’ 거주 권리가 강화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갭투자를 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전세 만기가 끝나도 세입자가 계약 갱신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늘면서 시장에선 실거주 목적의 매수가 어려워지고 전세를 끼고 매매하는 갭투자 물건이 늘고 있다. 실수요자들은 임차인이 나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갭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강서구의 K중개업소 대표는 “지금의 갭투자는 세입자를 내보내기도 어렵게 돼 어쩔 수 없이 보증금을 승계 받은 경우도 많다”며 “세입자가 있는 집을 사면 실거주를 하지 못하고 2년은 임대로 돌려야 해 결국 갭투자자 외에는 집을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또한 “지금도 2년까지 세 끼고 집 사고판다. 이제는 임차인이 살 수 있는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었다는 걸 전제로 매매 거래가 바뀌게 될 것”이라는 발언으로 정부가 갭투자를 용인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 25번째 대책 '또' 내놓나

갭투자를 잡겠다고 정부가 각종 정책을 남발했지만 규제의 부작용 탓에 갭투자 수요가 자극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시장에서는 서민의 주거 안정성만 위협받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부동산 정보 애플리케이션 '아실'에 따르면 최근 3개월 내 갭투자 증가 지역 1~5위는 경기 파주·김포·화성·시흥·남양주 순으로 모두 5억원 이하 아파트가 밀집한 수도권 지역이다. 서울에서는 노원·강서구 등 비교적 서민 수요가 몰리는 지역 중심으로 갭투자가 늘었다.

이처럼 임대차 3법이 통과된 이후 시장 불안이 예상보다 커지자 정부는 또 전세가격 안정을 위한 추가 대책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12일 "전월세 시장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필요하면 추가 대책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갭투자에 대해서는 현장의 목소리와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서 홍남기 부총리는 "투기수요 근절과 실수요자 보호라는 정책 목적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며 “서울과 투기과열지구 갭투자 비중이 5∼6월 전체 거래 중 50% 수준에서 9월에는 20% 수준으로 하락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내놓는 대책 대부분이 가격을 통제하는 방향이라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보고 있다. 전세 품귀현상만 더 부채질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부동산업계 전문가는 "전세 규제가 강화돼 공급물량이 줄면 결국 임차인들의 선택권만 줄게된다"며 "지금은 전세가격을 강제로 누를 때가 아니라 공급 방안을 강구할 때"라고 조언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