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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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예술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커지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영상을 활용하지 않는 공연이 드물 정도로 ‘무대 위 영상’이 일반화됐다. 날로 정교해지는 3차원(3D) 기법 등 첨단기술과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만나 뛰어난 영상미로 새로운 무대 미학을 창출하는 공연도 적지 않다.

조수현 영상디자이너(38·사진)는 국내 공연 영상 미학의 발전을 이끄는 주역으로 꼽힌다. 2015년 말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에서 처음 영상을 선보인 뒤 지금까지 작품 28편의 무대 영상을 제작했다. 뮤지컬 ‘헤드윅’ ‘그리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연극 ‘리차드 3세’, 무용 ‘리진’ 등이다. 그는 “극 중 인물의 내면과 꿈, 추억 등을 첨단 영상으로 무대에 구현하는 것이 새로운 영상의 자리”라며 “이를 극대화해 관객의 몰입을 도와주는 게 영상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조 디자이너는 서울예술대에서 무대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는 무대 디자인을 공부하면서도 영상에 줄곧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원래 다양한 영상 장치를 다루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연극은 아날로그 분위기를 중시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사용할 순 없었죠.” 그러다 월트디즈니사가 세운 미국 캘리포니아예술학교에 영상디자인학과가 개설된 것을 알게 돼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영상디자인을 체계적으로 배워 진로를 바꿨다.

최근 영상 기술이 많이 발전했지만 한 장면을 제작할 때마다 여전히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그가 지난해부터 맡고 있는 ‘헤드윅’에선 촬영만 3개월이 걸린 장면도 있다.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란 넘버(삽입곡)가 흐를 때 나오는 영상이다. “극 중 주인공 헤드윅이 어릴 적 잡지에서 오린 모델과 옷으로 인형놀이를 했다고 상상하고 영상을 제작했어요. 종이인형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찍어서 초당 12프레임으로 4분 동안 보여줬죠. 일일이 오려서 찍다 보니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지난 4월 말부터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그리스’는 영상의 힘으로 재탄생한 작품이다. 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자동차 경주 장면을 영상으로 실감나게 표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작자인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께서 첫 미팅 때부터 ‘자동차 장면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 이전엔 본 적 없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해상도의 투명 LED를 사용해 홀로그램 효과를 내게 했습니다.”

조 디자이너는 오는 10일 개막하는 뮤지컬 ‘시라노’와 연말에 공연할 예정인 ‘빅 피쉬’에서도 새로운 영상을 선보인다. 그는 공연 영상이 최근 수년간 커다란 발전을 이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이를 체감할 때마다 대학원 시절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곤 한다. “공연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다. 그걸 단 몇 년 만에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영상이 공연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로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된다”는 얘기였다. 그는 “앞으로 영상이 무대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