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美·北, 비핵화 정의부터 맞춰보라
지난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열리기 1주일쯤 전 일이다. 정상회담 준비 사정을 잘 아는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가 언론 브리핑을 했다. 그는 ‘비핵화 정의가 합의됐느냐’는 질문에 “더 진전시켜나가려고 초점을 맞추는 부분 중 하나”라고 답했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뭐냐’는 후속 질문엔 “북한과 협상 중”이라며 “그들의 입장을 특정 짓고 싶진 않다”고 했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가장 기초적인 비핵화 정의조차 합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뭔지도 불분명했다는 얘기다.

美 'WMD 폐기', 北 '모호'

이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김혁철 당시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가 하노이에서 정상회담 의제를 조율하기 위해 마주 앉았지만 북한 협상팀은 ‘비핵화’란 말조차 함부로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는 후문이다. “비핵화는 오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결정할 사안”이라는 이유였다.

실무협상은 겉돌았고, 이후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당시 미국은 비핵화를 ‘북한의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로 규정했다. 핵무기뿐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북한은 이에 동의하지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지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양측이 생각하는 비핵화 범위와 방법론이 너무 달랐다. 미국은 북한이 WMD를 전부 폐기해야 제재를 푸는 ‘빅딜(일괄 타결)’을 고수했다. 반면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를 조건으로 유엔이 부과한 핵심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배경이다.

지난해 6월 12일 열린 역사적인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비핵화 정의가 불분명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북은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했지만 총론 수준일 뿐 양측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뭔지는 모호하게 남겨뒀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개념에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현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한반도 주변에서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금지,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거까지 노리는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내년 美대선까지 시간 많지 않아

요즘 미국과 북한은 새로운 실무협상 재개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김정은과의 판문점 회동 후 ‘2~3주 내 실무협상 재개’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번주가 그 3주째다. 하지만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이 문제를 실무협상 재개와 연계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며 속도 조절을 시사했다.

미·북 실무협상 재개는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대화가 다시 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실무협상이 재개돼도 비핵화 정의가 합의되지 못하면 이후 협상은 해보나 마나라는 게 지난 1, 2차 미·북 정상회담의 교훈이다. 최종 목표(비핵화)의 개념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그 목표에 도달할 방법(로드맵)을 마련할 순 없다. 이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든, 온건파든 한결같이 지적하는 얘기다. 미·북이 다시 만나면 비핵화 정의부터 맞춰봐야 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도 한·미 공조를 통해 북한에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끝으로 하나 더. 내년이면 미국은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간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에 신경쓸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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