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회생 기틀 닦은 서경환…홈플러스 M&A 이끈 윤희웅
1980년대 말부터 수년간 사법연수원에서는 ‘홀짝법칙’이라는 농담이 돌았다. 연수원 기수가 짝수면 도서관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 많았고, 홀수면 술을 좋아하고 공부 외에 ‘딴눈’을 파는 경우가 꽤 많았다는 얘기다. 연수원 21기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바깥 세상에도 관심이 많고 자유분방해 연수원 교수들의 골치깨나 썩인 기수”라고 입을 모은다. 당시 연수원 교수 중엔 양승태 전 대법원장(2기)이 있었다.

21기의 ‘사법연수원지(誌)’ 사건은 당시 일간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일화다. 사법연수원지는 연수생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연수원 소식 등을 싣는 ‘자치회보’다. 21기가 입소한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보수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들어섰다. 10명 안팎이던 21기 편집위원들은 “민자당이 재집권할 가능성은 23%”란 내용의 연수원 설문조사 내용을 회보에 실었다.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며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연락이 오고 검찰 출신 교수들이 편집위원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논란이 됐다. 당시 편집위원장은 노무현 정부의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다. 이선애 헌법재판관도 21기 편집위원 중 한 명이다.

‘단상권’ 3명 중 2명이 여성

21기로 입소한 총 300명 중 여성 연수생은 14명으로, 채 5%도 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21기 여성들 중엔 ‘알짜’들이 여럿이다. 연수원 성적 순으로 수료식에서 대법원장상(1등)·법무부장관상(2등)·대한변협회장상(3등)을 받는 이른바 ‘단상권’ 세 명 중 두 명이 여성이었다.

그중 대법원장상을 받은 여미숙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사법연수원 사상 최초 여성 수석이다. 판사 출신인 여 교수는 법원행정처 조사심의관과 정책총괄심의관 등 법원 내 대표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한때 유력한 대법관 후보로 거론됐다. 동기인 이상원 서울대 로스쿨 교수와 ‘연수원 커플’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대한변협회장상은 이선애 헌법재판관이 받았다. 이 재판관은 사법시험(제31회) 성적으론 수석이다. 사시 합격 당시 의류노점상을 하는 의붓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한 것으로 화제가 됐다. 판사로 임관한 그가 15년 만에 법복을 벗고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로 갈 땐 동기들 사이에서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워낙 얌전하고 차분한 성품이라 공직이 더 어울린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주변의 우려가 무색하게 10년 넘게 변호사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법무부 차별금지법 제정추진단 위원 등 왕성한 외부 활동을 이어가다 2017년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문재인 라인’ 김외숙 법제처장도 21기다. 동기들은 김 처장이 “떡잎부터 달랐다”고 말한다. 연수원 시절부터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다니며 노동인권회관에서 무료 법률상담을 하는 등 인권·노동 분야에 일찍이 관심을 보였다. 김 처장은 연수원을 졸업하자마자 부산에서 활동하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합동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그 후신인 법무법인 부산에 계속 남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2017년 현 정부 첫 법제처장으로 임명됐다.

‘뇌물’ ‘적폐’…우여곡절 많은 檢 동기들

법복을 입은 21기 가운데 서경환 서울회생법원 수석부장판사는 법원 내 최고의 도산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국내 개인회생·파산 제도의 ‘아버지’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3년차 판사로 서울지법 파산부에서 배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토종 도산 전문가를 양성하라는 IMF 지시에 따라 국가 지원을 받고 미국 연수를 떠났다. 현지에서 소비자파산을 연구하고 돌아온 서 수석부장판사는 개인채무자회생법의 초안 작업을 맡았다.

서 수석부장판사는 ‘세월호 판사’로도 유명하다. 2015년 광주고등법원 재직 당시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세월호 승무원 15명에 대한 항소심 재판장을 맡아 이 선장에게 1심보다 훨씬 무거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서 수석부장판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판결문의 양형 사유를 주심 판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썼다”며 “쓰면서도 울컥해서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법정에서도 목이 메어 몇 번이나 읽기를 멈춰야 했다”고 털어놨다. 그가 선고문을 읽으며 울먹이자 현장의 유가족들도 따라 울었다는 후문이다.

검찰로 간 21기는 총 90명으로, 주변 기수와 비교해 이례적으로 많은 검사를 배출했지만 그만큼 구설에 오른 인물도 많다. 21기 검사 중 수석으로 서울중앙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진경준 전 검사장은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나 넥슨 주식을 뇌물로 수수했다는 혐의로 현직 검사장 최초로 구속기소당하는 오명을 얻었다. 장호중 전 부산지검장은 박근혜 정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 1년의 실형을 확정받았다.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간담회를 연 ‘검사와의 대화’에 참석한 이석환 전 검사장은 지난해 검찰을 떠났다. 검찰 내 존경받는 현직으로는 ‘기획통’으로 동기 중 가장 먼저 고검장으로 승진한 박균택 광주고검장과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진두지휘한 한찬식 서울동부지검장 등이 있다.

日 강제징용·위안부 소송 진두지휘

대형 로펌에서 전문성을 쌓으며 활약 중인 파트너변호사들도 여럿이다. 법무법인 율촌의 윤희웅 대표변호사는 기업 인수합병(M&A)과 금융 양쪽에 전문성을 갖춘 ‘팔방미인’이다. 윤희웅 대표변호사는 MBK파트너스의 홈플러스 인수, 롯데쇼핑의 하이마트 인수, 현대자동차의 신흥증권(현 현대차증권),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의 제일은행 인수 등을 자문했다. 같은 로펌의 박성범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자마자 당시 미개척 분야였던 공정거래 분야를 파고들어 대가가 됐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박현욱 변호사는 기업회생·구조조정 분야 ‘스타 플레이어’다. 연수원 차석이자 사시 차석이었던 김도영 김앤장 변호사는 론스타, 제너럴모터스(GM) 등을 자문한 경력이 있는 외국인 투자 전문가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리해 얼마 전 대법원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 낸 최봉태 변호사도 21기다. 최 변호사는 2011년 헌법재판소에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 관련 대일 외교에서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 밖에 국회에는 김정훈 자유한국당 의원과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이 있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24기)의 남편인 김재호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도 21기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