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에는 그럴싸한데 결과는 늘 공허한 게 ‘국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이다. 이런 ‘관제(官製) 행복’은 정치구호로는 매력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선 전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핵심 국정철학으로 ‘더불어 잘사는 경제’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내걸었지만, 오히려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커지고 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때다.

단적인 예가 ‘저녁이 있는 삶’을 명분 삼은 ‘주 52시간 근로제’의 도입 실상이다(한경 3월29일자 A1, 4, 5면). 30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한 지 9개월이 지나도록 산업현장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다. 일을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근로자는 월급이 줄었고, 경영자는 자칫 범법자가 될까봐 생산량을 줄이고 기업 매각, 해외 이전까지 고민할 정도다.

지난 1년 새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2300건 넘게 올라온 주 52시간 관련 청원의 태반이 “일 더 하게 해달라”는 하소연이다. ‘지킬 수 없고 지켜도 행복하지 않은 제도’라는 폐부를 찌르는 표현이 수두룩하다. 더구나 사업주 처벌을 유예한 계도기간이 이달 말 종료되고, 300인 미만까지 확대 시행되면 그 후폭풍은 최저임금 과속인상보다 훨씬 클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 ‘일할 의욕’도 ‘기업할 의지’도 꺾였는데 개인 행복과 사회 활력이 생길 리 만무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분명 가치 있고, 가야 할 방향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 삶의 복잡다단함과 산업·직종별 특성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획일적으로 적용하니 거꾸로 ‘저녁거리가 없는 삶’이 돼 간다. 중소·중견기업, IT기업, 외국기업들까지 탄력근로·선택근로제 보완을 호소하지만, 노동계 반발에 국회 논의조차 멈춘 실정이다. 제도 설계자들이 이런 파장을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무시했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념으로 그려낸 소득주도 성장, 파장을 무시한 ‘최저임금 1만원’, 기업지배구조 정답을 정부가 주겠다는 재벌 개혁, 과학 대신 이념을 앞세운 탈(脫)원전 등도 그 기저에는 국가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끌 수 있다는 국가설계주의가 깔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계 어디에도 국가설계주의가 성공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계주의에 기반한 국가사회주의가 번번이 실패한 것도 수백만 수천만 경제주체들의 욕구와 선택, 그 결과와 파장을 일일이 파악하고 계획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것부터가 ‘치명적 자만’이라고 하이에크가 경고한 이유다.

복잡계와 같은 경제와 시장에서 ‘정부는 만능’이라는 자만은 통하지 않는다. 정부의 한계를 인식하고 민간과 시장의 자발적 창의성을 북돋우는 게 경제·사회 활력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는데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설계주의 환상에서 이젠 깨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