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호머 헐버트를 추모하며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다음주면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열린다.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애국 선열들을 생각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를 떠올렸다. 한국 사랑의 힘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필자는 지난 26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참배했다.

필자는 헐버트의 일대기를 읽고 그의 한국 사랑에 감동을 받았고,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 펠로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조선 말 암울한 시기에 조선의 문명 진화를 위해 헌신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오죽하면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헐버트는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존경을 표했겠는가.

헐버트는 1863년 1월26일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1884년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명문 다트머스대를 졸업했다. 그해 유니언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886년(고종 2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미국인 동료 교사 2인과 함께 영어, 산수, 지리, 정치경제학 등을 가르치며 근대 교육의 주춧돌을 놓았다.

1905년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고종황제의 밀사로 임명돼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일본의 농간으로 실패했다. 대신 국무장관을 면담했다. 고종에게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했다. 헐버트는 황제의 밀사로 임명돼 헤이그로 갔다. 그러나 1907년 7월 일본의 박해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했다. 이후 언론 기고 및 강연을 통해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온 생애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일에 바쳤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받아 내한했으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1주일 만에 서거해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늘 한국 사랑을 표현했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됐고, 2014년에는 한글 발전에 대한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헐버트를 움직인 것은 사랑이다.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지금 삶도 존재한다. 모두가 헐버트처럼 한국 사랑을 위해 뛰자는 얘기는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그리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삶을 핑계로, 바쁨을 핑계로 내 이웃과 사회를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내 안의 작은 떨림, 사랑의 시그널이 묻히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