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차근차근 천천히
일본에 사는 평범한 노부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촬영을 시작했을 때 할아버지의 나이는 87세, 할머니는 84세였다. 영화는 할아버지가 90세 되던 해에 오전 작업을 마치고 잠들 듯 편안히 돌아가시기까지 3년간을 다룬다. 부부는 65년을 해로했다.

건축학을 전공한 할아버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주거환경을 고집스럽게 꿈꿨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고야 근처에 990㎡의 공터를 사서 손수 집을 짓고 50년 넘게 100여 종이 넘는 과일과 채소로 빼곡히 정원을 일궜다. 둘 다 빈틈없는 손재주로 부지런히 일한다. 할머니는 감자를 싫어하나 할아버지를 위해 감자 요리를 즐거이 한다. 따로 사는 어린 손녀가 언젠가는 할머니의 음식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집에서 키운 채소로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어 보낸다.

할아버지는 정원의 꽃과 채소마다 재미있는 팻말 이름표를 달아주고, 손녀에게 장난감 나무 인형집을 솜씨 있게 만들어준다. 도움을 주는 이웃들에게 칭찬하는 그림엽서를 보내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할아버지는 염원하던 숲, 바람길과 조화를 이룬 병원의 건축 설계도를 무료로 제공하고, 그 병원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설계도대로 준공된다.

영화 중 반복되는 내레이션이 어느새 귀에 익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하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1919년 태어난 남기동 선생님은 올해 100세다. 경성제국대에서 요업을 전공하고, 광복 후 중앙공업연구소에서 시멘트 기술을 개발했다. 국내 최초로 1957년 문경에 시멘트 공장을 짓고, 그 기술을 한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전파한 분이다. 인생을 일관되게 시멘트산업 한길에 매진해 엔지니어, 교수, 최고경영자(CEO)로 최선을 다했다. 두 살 아래인 부인과는 76년을 해로했다. 3남 3녀의 자녀는 두 명의 의사 아들과 한 명의 공학자 그리고 세 명의 의사 사위를 이뤘다. 늘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살아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을 더해 우리나라 시멘트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놨다. 가정의 튼실함도 비할 바가 아니다. 관련 학회의 발전을 위해 큰돈을 흔쾌히 기부했다.

이 어른의 인생 철학 가운데 ‘시간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니 믿고 기다리라’는 당부가 있다.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원할 때 그 결과를 얻는 시간을 임의로 정해 조급해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변화를 기다린다면, 인생은 더욱 조화롭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열매는 바람의 결과다. 떨어진 나뭇잎이 땅을 바꿀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와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차근차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