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내 젊은 날의 초상
“10년쯤 뒤엔 학생을 매스컴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 1977년 1월 말, 대학 2학년 겨울방학 때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으로 들른 경포대 바닷가에서 들은 이야기다.

친구가 마산(지금의 창원)에 있는 외삼촌 댁에 가서 며칠 놀고 오자고 했다. 사나흘 놀다 오겠다고 집에 말씀드리고 동대구역에서 오후에 출발하는 보통 급행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마산역에 내리는 순간 “외삼촌 댁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한마디와 함께 여행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여곡절 끝에 첫 행선지는 충무(지금의 통영)가 됐다. 계획이라곤 없이 버스터미널이나 역에서 내키는 대로 행선지를 정하다 보니 거제도 해금강, 남해대교, 지리산 화엄사, 전주를 거쳐 신태인, 대둔산, 금산, 속리산 법주사, 영주 부석사, 대관령, 경포대까지 국토를 대각선으로 종단하는 11박 12일의 여행이 돼버렸다.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던 학생처 직원 선생님에게 빌린 1만원이 떨어질 때까지 다니자고 했는데 중간 중간에 있는 친척 집에서 영양 보충도 하고 용돈까지 충전한 덕분에 정처 없이 떠돈 길이 그렇게 길어졌다. 끼니는 110원짜리 자장면이면 호사에 속했고 선술집에서 50원 하는 왕대포 한 잔 시켜놓고 주모에게 애교를 떨어 얻은 식은 밥 한 그릇을 시래깃국에 말아 먹고는 했다. 당시엔 인심이 좋아 밥은 물론 잠도 여러 번 공짜로 잘 수 있었다.

희망이나 가능성보다는 절망과 금지가 더 많았던 대학시절에 거제 해금강으로 가는 버스에서 맞은 은빛 바다는 환희와 같은 장관이었고, 칼바람을 맞으며 시내 길을 걸어 찾아간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본 소백산맥의 전경은 막연한 희망 같은 걸 선사했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이라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언감생심이어서 가는 데마다 배낭에 넣고 다닌 화구 박스와 야외용 이젤을 펼쳐 현장 사생을 하고, 완행 기차에서는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느라 낑낑대기도 했다. 방한복도 없이 운동화를 신고 지리산 노고단까지 눈길 산행을 했고,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느라 관제엽서에 스케치를 해서 보내곤 했는데 얼마나 추웠던지 볼펜이 얼어버릴 정도였다. 500원짜리 여인숙에서 지내면서도 누추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 걸어가면서 삼립 식빵에 얼어버린 마가린과 설탕을 뿌려 끼니를 해결해도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건 젊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다니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 강릉 경포대 바닷가였다.

밤에 출발하는 열차 시간에 맞추느라 경포대 바다를 한 장 그리자마자 추위 피할 데를 찾다가 살짝 열린 포장마차에 들어갔는데 마침 라면을 끓이던 중년의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돌아 나오려는데 괜찮다며 그냥 들어오라고 해서 화구를 펼쳐 경포대 앞바다를 그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온 얘기가 “10년쯤 뒤엔 학생을 매스컴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였다.

남편 되는 분은 유학을 다녀온 교수인 듯했는데 필자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틀림없이 잘될 거라고 격려의 말을 한 것이었을 게다. 정확히 10년이 되기 전에 국전에서 상을 받아 지방신문에는 인터뷰 기사까지 났으니 그분의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그때 빌린 돈은 당시로서는 갚을 길이 없었으니 그림으로 대신했고, 모교에 전임교수로 부임한 후 새 그림으로 바꿔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