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아날로그 감성의 로봇 이야기 '어쩌면 해피엔딩'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 세상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인류의 전유물일 수 있을까.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인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있다. 낡은 데다 수리할 부품도 단종된 둘은 오래전에 떠났거나 사라진 주인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무대는 충전기가 고장난 클레어가 올리버의 집을 찾으며 본격적인 사연을 들려준다. 고민을 들어주고 반딧불이를 찾아 함께 여행도 하며, 인간의 사랑 같은 감정도 알게 된다. 그러나 감정이 깊어질수록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수반하는 고통 또한 알게 되고, 결국 고민에 빠진 둘은 메모리칩 속의 상대에 관한 기억들을 지워버리기로 약속한다.

다시 미래의 어느 날. 충전기가 고장난 클레어가 올리버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올리버는 예전과 달리 아무 말이나 조건 없이 충전기를 내준다. 올리버는 아직 클레어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걸까. “괜찮을까요.” 걱정스레 질문하는 클레어에게 올리버는 말한다. “어쩌면.”

소극장 무대에서 마니아 관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상복이 많은 작품이다.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6개 부문을, 제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선 4개 부문을 휩쓰는 파란을 일으켰다. 대학로의 수수한 소극장 뮤지컬이 화려한 볼거리로 치장한 대극장 뮤지컬을 훌쩍 뛰어넘은 흥미로운 사례다.

가장 큰 미덕은 음악적 완성도에 있다. 재즈와 클래식, 복고풍의 스탠더드 넘버들이 아련한 향수를 풍긴다. 이야기의 배경은 미래이고 인간이 아닌 로봇이 주인공인데,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끼게 하는 묘한 음악적 대비는 옛것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따스함과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포근하고 세련되고 서정적인 음악들이 로봇의 사랑이라는 소재의 딱딱함을 상쇄하는 셈이다.

이 뮤지컬을 만든 이는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그리고 뮤지컬 ‘신과함께’나 ‘난쟁이들’을 통해 독특한 재미의 무대를 선보였던 김동연 연출이다. 아기자기하고 꼼꼼한 대사, 감미로운 음악적 구성 안에 담긴 곱씹을수록 맛이 다른 사랑의 의미와 유머러스한 전개가 흥미롭다. 설정 자체가 헬퍼봇들의 사랑이라는 상상 속 이야기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스러운(?) 반응과 진솔함에 슬며시 감동마저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우란문화재단의 기획으로 개발됐다. 2015년 우란문화재단 리딩 공연(최소한의 무대배경으로 대본 리딩을 하는 공연)과 트라이 아웃(시험 공연)을 거쳐 2016년 뉴욕에서 다시 리딩 공연을 열었고, 그해 말 대학로에서 첫 무대를 시작하며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작품 제작의 첫 단계부터 전개된 담금질 과정이 탄탄하고 교과서적으로 진행돼 뮤지컬 창작의 바람직한 사례가 됐다.

너무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은 결말은 마니아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 추측과 자기 나름의 결론을 찾게 한다. 수십 번 무대를 찾았다는 한 관객은 올리버뿐 아니라 클레어도 기억을 지우지 못한 것 같다는 해석과 추측을 인터넷 댓글로 남기기도 했다. ‘충전기를 건네거나 건네받는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와 같은 반응들이다. 열린 결말이 아련한 아쉬움으로 이어져 관객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셈이다.

추운 겨울을 녹이는 포근한 감성이라 좋다. 세련된 창작 뮤지컬과의 만남이라 더 반갑다. 앞날을 기대하게 되는 K뮤지컬의 현주소가 보이기 때문이다. 롱런을 기대한다.

jwon@sch.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