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특파원
김현석 특파원
“외교부에 들어온 게 1979년 5월이니까 어느새 만 39년이 됐네요.” 조태열 주(駐)유엔 대사(64)는 한국 외교관 2300여 명 가운데 최고 선임자다.

미국 뉴욕에 막 봄기운이 찾아온 지난 12일 맨해튼 미드타운 이스트에 있는 멕시코음식점 팜파노에서 조 대사를 만났다. “몇 년 전 스페인 대사를 지냈어요. 누가 스페인 음식인 줄 알고 이 식당을 소개했는데, 알고 보니 멕시코 식당이더라고요. 입맛에 맞아 가끔 옵니다.”

2016년 11월 부임한 조 대사는 외교관으로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임기를 유엔에서 보내고 있다. 지난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네 번이나 북한 제재를 결의했고, 그는 누구보다 동분서주했다. 지난 1년여의 노력이 결실을 볼지 조만간 판가름 난다. 남북한 그리고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된다면 큰 보람을 안고 떠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조 대사의 스마트폰은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와 주고받은 수백 개의 문자메시지로 가득했다. 벳쇼 고로 유엔주재 일본 대사까지 세 명이 함께하는 문자대화방도 있다. 조 대사는 “한·미 정부 간 신뢰에 더해 (헤일리 대사와의) 개인적 신뢰가 없었다면 제대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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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처음 자성남 유엔주재 북한 대사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회의 등에서 마주칠 일이 있어도 서로 피했지만 대화 분위기가 조성된 만큼 이제 자연스럽게 인사한다. “다른 나라 대사들이 보기 좋다고 한다”며 웃었다.

조 대사는 올 1월까지 1년 동안 유엔 평화구축위원회(PBC) 의장을 맡았다. 안보리가 분쟁을 해결한 뒤 손을 떼면 전쟁이 재발하는 게 다반사다. 그런 분쟁과 내전,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설립한 기구다. 새 정권이 확실히 자리잡아 평화가 정착되도록 돕고, 만에 하나 분쟁이 생길라치면 이해관계자를 모아 이견을 조율한다. 2014년 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 확산을 막은 주역도 PBC였다.

“외교 역량은 우리 일을 잘 해결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이 한국의 외교 역량을 평가하는 건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수많은 글로벌 이슈에 얼마나 기여하고, 차별적인 역할을 찾아내 이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감비아를 위해 우리 대표부에서 리셉션을 열어준 걸 가장 기억나는 일로 꼽았다. “20년 독재를 청산한 나라인데, 독재자가 금고를 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정부가 제대로 일을 못 하더라고요. 작년 6월 감비아 법무부 장관이 세계에 이 문제를 호소하겠다며 유엔에 왔는데 돈이 없어 회의장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대표부 리셉션홀을 빌려주고 세계은행 등 각종 국제기구, 각국 대사를 초청하면서 2500달러 정도의 밥값도 우리가 냈습니다.” 이 일은 아프리카 수십 개국 대사들의 입을 통해 계속 퍼지고 있다. 한국의 이미지는 그만큼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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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사는 20년 이상 통상 분야에서 일한 통상전문가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시작될 때 당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가장 먼저 수석대표를 맡아달라고 했던 사람이 조 대사다. 조 대사가 통상 분야에서 일하던 1980~1990년대는 한국이 미국의 슈퍼301조 등에 일방적으로 당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20년을 막는 데만 주력하다가 한·미 FTA란 포괄적 협상을 하면서 주고받는 식으로 방향이 바뀌었지요. 하지만 그때 이후 통상을 떠나 뭔가 얻어내지 못한 게 아쉽네요.”

외교부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물었다. “무엇보다 ‘힘센 자에게 당당하고, 약한 자에게 따뜻한 외교관이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힘의 균형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협상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는 “강대국 앞에서 당당해지는 게 말처럼 싶지 않다”며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고 중압감이 큰 상태에서 강대국이 ‘팔 비틀기’로 나오면 체통을 잃지 않고 버티기가 무척 힘들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 하고 그러려면 “평소 체력 훈련을 하듯이 실력을 쌓아야 하고 정교한 논리와 이론, 자긍심뿐 아니라 유머감각까지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힘이 약한 나라와 협상할 땐 따뜻한 마음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조 대사는 “10~20년 전에 우리가 다 겪은 일이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며 “‘졸부’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는 2013~2016년 외교부 제2차관을 지냈다. 일본과 위안부 문제로 한창 싸울 때였다. “무슨 해결책이 있을까”하고 물었더니, 조 대사는 외교관 생활을 막 시작한 1980년 얘기를 끄집어냈다. 그는 당시 첫 임무로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회의에 참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끝자리에 앉았는데, 당시 우리 수석대표가 일본 말로 개회사를 하더군요. 일본어를 모르는 데다 기분도 나빠서 20분쯤 앉아있다가 짐 싸들고 나왔지요.” 그날 저녁 일본대사관저에서 리셉션이 열렸는데, 중년 신사가 그를 찾았다.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당시 일본 대사였다. 스노베 대사는 “오늘 일을 보고받았다. 초임 외교관으로서 뭘 느꼈을지 짐작이 된다. 오늘 회의는 기술적인 것이어서 각자 언어로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고, 둘 다 영어는 서툰데 다행히 한국 대표가 일어를 잘해서 그렇게 하기로 양해를 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더니 중앙홀로 나가 “안녕하십니까. 요새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라며 한국말로 인사했다. 조 대사는 감동 받았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스노베 대사는 이후 유엔 대사와 외무성 차관을 지냈다. 조 대사는 “만약 40년 전 스노베 대사가 나를 대했던 그런 마음으로 한국을 배려하면 서로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며 “일본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조 대사는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아들이다. “시인과 외교관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원래 집안에 정관계 출신이 더 많단다. 조선 중기 문신인 조광조 후손으로 경북 영양에 한양 조씨 종택이 있다. 기묘사화를 겪은 뒤 산골인 영양에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고 했다. 조 대사의 할아버지는 조헌영 제헌 국회의원으로 6·25 전쟁 때 납북됐다. “어렸을 때 인명사전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나왔어요. 그런데 부자 3대 못 간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괜한 압박감이 있었지요. 요즘은 저도 인명사전에 나오니 집안에 누를 끼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집안은 조용헌 원광대 교수가 지은 책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에 첫 번째로 소개됐다.

그는 열세 살 때 부친이 돌아가신 뒤 스스로 벌어 학교를 졸업했다. “인세는 거의 없을 때였고, 종가가 아니어서 전답도 없었다”고 했다.

왜 외교관을 택했을까. “어렸을 때부터 삶의 무대를 해외로 넓히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편이 안 좋아 유학은 꿈도 못 꿨습니다. 공직에서 일하는 게 경제적으로 혼자 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요.”

뉴욕 근무는 처음이다. “맨해튼은 섬 같은 곳이어서 이 안에서 문화생활을 즐겨야 살 만한 곳인데 그럴 틈이 없다”고 말했다. 유엔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평화 구축, 지속가능한 개발, 환경, 테러, 기후 변화, 난민 등 수많은 이슈를 다루는 회의가 열린다. “미리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을 대표하는 대사로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퇴임 이후 계획을 물었다. 조 대사는 “40년간 외길을 걸어와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남들을 살펴보고 봉사하는 기회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을 맺었다.

"회담이 시간끌기 전략이라면 더 아픈 결과 올 것… 北도 알아"

조태열 주(駐)유엔 대사는 “북핵 해결을 위한 논의는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대한의 제재로 밀어붙인 게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오는 27일 열릴 남북한 정상회담과 5월 말 또는 6월 초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으로 북핵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들이 해결의 큰 틀을 만들어주고 외교관들이 그 안에서 정교한 딜(프로세스)을 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대사는 “북한이 시간을 끌려는 것이란 관측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후 더 아픈 결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도 (이를) 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1년간 북한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한·미 간 갈등설도 나돌았다. 조 대사는 “새 정부가 변화를 추구해도 북한이 계속 도발했기 때문에 실제 달라진 건 없었다”며 “지난해 제재 강도를 계속 높였고 그 기조에서 미국 일본 등과 잘 협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55년 서울 출생
△1979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79년 외무고시 합격
△1995년 외교부 통상2과장
△2000년 주미대사관 참사관
△2006년 통상교섭조정관
△2013년 외교부 제2차관
△2016년 유엔대표부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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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열 駐유엔 대사의 단골집 팜파노
멕시코 유명 요리사가 운영… 은대구 요리 일품

[한경과 맛있는 만남] 헤일리·벳쇼 대사와 단톡방 대화… 북핵 등 미묘한 사안 수시로 조율
팜파노는 멕시코 출신 유명 요리사인 리처드 산도발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프로테니스 선수이던 그는 1997년 뉴욕에 현대식 멕시코 레스토랑 마야를 열면서 명성을 얻었다.

뉴욕 워싱턴DC 시카고 LA 등 미국 전역과 일본 도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아부다비 등에서 45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팜파노는 라틴풍 요리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퓨전 멕시코 요리를 선보인다. 타코(17~20달러)가 맛있고, 은대구 등 생선 요리(37달러)와 닭고기 요리(29달러)도 뛰어나다. 점심에는 28달러에 세 가지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욕데일리뉴스 등이 맛집으로 소개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