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학력·지역 보지 마라"…기업들 "채용 방식까지 간섭 지나쳐"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블라인드 채용’을 민간기업으로 확대할 것임을 시사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실력만으로 평가하자는 취지이지만, 채용 현실을 무시한 일방적 가이드라인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문 대통령이 주문한 ‘공공기관 지역 인재 30% 할당제’ 시행을 놓고도 역차별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스펙 없는 이력서 의무화

문 대통령은 이날 “채용하는 분야가 일정 조건을 요구하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이력서에 학벌·학력·출신지·신체조건 등 차별적 요인을 일절 기재하지 않도록 해서 오로지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의무제를 공약했다. 정부는 이달 말까지 이 같은 내용의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실천 방안’을 확정해 발표할 계획이다.

문 대통령은 민간 부문까지 블라인드 채용제를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관련 법을 개정할 뜻을 내비쳤다. 그는 “(블라인드 채용제) 법제화 전까지 민간 쪽은 우리가 강제할 수 없는데 민간 대기업들도 과거 블라인드 채용제를 시행해 훨씬 실력과 열정 있는 인재를 채용할 수 있었다는 게 증명됐다”며 “민간 대기업에도 권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업들 “이미 스펙 기입란 간소화 추세”

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대기업들은 대부분 공개채용으로 대규모 인력을 충원한다. 삼성그룹 공채에만 10만 명이 몰릴 정도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우수 인재를 뽑는 게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스펙 이력서’는 선발 과정에서 비교적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한 객관적 지표로 활용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특정 학교나 출신을 의도적으로 뽑는다는 비판도 있다.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다수 대기업들은 이 같은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서류 일부와 면접시험에서 블라인드 전형을 시행하고 있다. 기업으로서도 단순 스펙이 아니라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채용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삼성, LG 등 대기업의 비수도권 출신 인재 채용 비율은 30%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한 기업 인사 담당자는 “기업들이 직무에 적합한 인재 채용을 위해 스펙 기입란을 간소화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국은 미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국처럼 직무 능력만 보고 뽑는 수시채용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다른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한국은 많은 사람에게 채용 시험을 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공채가 일반화돼 있다”며 “외국처럼 수시채용으로 사람을 뽑으면 연줄로 뽑는다는 또 다른 논란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이 나서서 민간기업의 채용 방식까지 제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꼬집었다.

◆공기업들 “30% 어떻게 채우나”

문 대통령이 “혁신도시 사업으로 지역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이 신규채용을 할 때 적어도 30% 이상은 지역 인재를 채용했으면 한다”고 한 발언을 두고도 비판이 나온다. 현재 관련법에는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대졸 직원은 해당 지역 대학, 고졸 직원은 해당 지역 고교 출신을 우선 채용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10~20% 수준에서 지역 인재를 뽑고 있다.

하지만 ‘지역 인재’라는 기준을 둘러싸고 역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는 서울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지방 대학을 간 사람은 지역할당제 채용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지방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서울로 대학을 온 사람은 혜택을 받을 수 없어서다.

문 대통령이 일률적으로 30%라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공공기관들은 고민에 빠졌다. 예컨대 울산시에 이전한 공공기관은 한국석유공사 등 9곳이지만, 해당 지역 대학교는 울산대 울산과학대 춘해보건대 등 3곳에 불과하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본사가 있는 지역 출신으로 어떻게 30%를 채울지 걱정”이라며 “지역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지방대를 위한 정책 아니냐”고 되물었다.

조미현/공태윤/이태훈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