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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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욱 기자 ] "좋은 제품보다 좋은 문화를 남겨주는 것이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창업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쓰레기를 돈으로 돌려준다는 일은 뭔가 근사하지 않나요. 해답은 'AI(인공지능)'에 있었어요"

김정빈 수퍼빈 대표(45·사진)는 재활용 자판기를 후대의 문화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시민들의 소통창구 역할을 한 '공중전화'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는 유산을 남기고 싶단 얘기다.

김 대표의 창업 철학은 '홍익세상(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이다. 거창해 보이지만 의미는 단순하다. 그는 "대기업 아닌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도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라며 "대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꼭 성공해 미래 세대가 필요한 가치를 제공하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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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연매출 4000억 규모 철강(선재)업체의 CEO였다. 미국 오리건대학,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코넬대에서 수학한 그는 마흔 한살의 나이에 '코스틸'의 사장에 발탁됐다. 당시 철강업계에선 김 대표의 이력이 화제였다.

철강업계에서는 해당 회사 출신들이 CEO에 오르는 일이 관례다. 직원으로 입사해 차근차근 승진 절차를 밟거나 그룹사의 임원을 거쳐 임명되곤 한다. 그렇다보니 외부인에다 40대 초반의 나이, 하버드대학 출신이란 점은 업계에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됐다. 더 놀라운 일은 그가 CEO가 된지 2년도 안돼 사표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보수적인 철강업계에 어느날 불쑥 어린 사람이 나타나 사장이 되니 그분들 입장도 유쾌하진 않았겠죠"라며 "하지만 회사를 그만둔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오롯이 제가 결정하고 추진해야할 사업에 목 말랐던게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업간 거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튼튼한 기업의 안정적인 CEO자리였지만, 오너 기업의 사장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코스틸 CEO 자리를 과감하게 내던진 까닭이다.

김 대표가 선택한 가치 실현의 출발점은 '재활용 자판기'였다. 재활용 자판기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상황을 간파, 2015년 6월 수퍼빈을 창업하고 재활용 자판기 국산화에 매진했다. 수퍼빈은 'Super(대단한)+Bin(쓰레기통)'이란 의미에서 따왔다.
네프론은 지난해 9월 과천시민회관에 정식 보급됐고 이후 4대가 추가로 배치됐다. 현재 한 대당 하루 평균 이용 횟수는 400~500건이다/사진=이진욱 기자
네프론은 지난해 9월 과천시민회관에 정식 보급됐고 이후 4대가 추가로 배치됐다. 현재 한 대당 하루 평균 이용 횟수는 400~500건이다/사진=이진욱 기자
김 대표는 "소비자가 찾아가지 않는 빈병 보증금이 한 해 600억원에 육박한다는 점에 놀랐습니다"라며 "게다가 재활용 쓰레기 처리 과정이 자동화가 되면서 찾아가지 않는 돈은 점점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더라고요. 줄인 비용만큼 소비자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의 꿈을 위한 첫 단추는 오래지 않아 꿰어졌다. 창업 1년3개월만에 인공지능(AI) 재활용 자판기 '네프론'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네프론은 인공지능 '뉴로지니'를 기반으로 폐기물의 종류를 학습해 스스로 판단하고 선별하는 로봇. 뉴로지니는 알파고와 같은 '딥러닝' 기술이 적용됐고 권인소 KAIST 교수와 RCV 연구팀이 개발한 로봇 '휴보'의 인공지능에서 발전된 형태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영전문가인 김 대표에게 IT 개발분야는 무척 생소한 분야였다. 여러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AI 기술 자체도 생소했지만 가장 큰 고민은 전자제어장치와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 통신 웹사이트 구축개발 모듈에 대한 개발 파트너를 구하는 작업이었어요"라며 "각 개발자들의 역량을 확인하는 것도 막막했습니다"라고 소회했다.
김정빈 대표는 국무총리상 수상이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수퍼빈 직원들에게 큰 힘이 된다며 웃어보였다/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김정빈 대표는 국무총리상 수상이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수퍼빈 직원들에게 큰 힘이 된다며 웃어보였다/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이런 김대표에게 손을 내민건 '미래과학기술지주'다. 김 대표의 비전과 수퍼빈의 사업 모델을 높게 평가받은 결과다. 수퍼빈은 미래과학지주에게 KAIST의 기술 등 우수한 인프라를 지원받으며 시제품 개발을 앞당길 수 있었다.

네프론은 지난해 9월 과천시민회관에 정식 보급됐고 이후 4대가 추가로 배치됐다. 현재 한 대당 하루 평균 이용 횟수는 400~500건이다. 주말에는 700건이 넘는다. 네프론은 올해 제주개발공사에 20대, 구미시와 의성군에 각각 6대, 1대가 설치될 예정이다. 이외에 지자체를 중심으로 문의가 늘고 있다.

네프론 이용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액정 화면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투입구에 캔과 페트병을 넣으면 딥러닝 기술이 적용된 회선신경망(CNN)이 영상을 통해 캔과 페트병을 인식, 분리하고 압착한다.

압착이 끝난 후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면 모든 정산이 완료된다. 캔은 1개당 15원, 페트병은 10원. 수퍼빈 홈페이지에 가입해 본인확인 과정만 거치면 현금이 지급된다. 향후 개선 작업을 통해 통장으로 자동 입금되는 시스템이 추가될 예정이다.
수퍼빈은 지난달 말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미래 성장 동력 챌린지 데모데이'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수퍼빈은 지난달 말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미래 성장 동력 챌린지 데모데이'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김 대표는 "벌써 10만원을 모은 사용자가 나왔어요. 시민들의 적립금이 쌓인다는 건 그만큼 네프론이 커간다는 말 아닐까요"라며 웃었다.

최근 네프론은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지난달 말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미래 성장 동력 챌린지 데모데이'에서 우승한 것.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최우수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한데다 2억원의 상금까지 거머쥐었다.

김 대표는 "이번 수상은 네프론의 가능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고 봅니다"라며 "저를 믿고 따라와준 수퍼빈 직원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어요"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이달부터 네프론 알리기에 팔을 걷어붙인다. 우선 네프론만의 공간으로 다가간다는 계획이다. 수퍼빈은 오는 17일 과천중앙공원에 재활용과 문화가 어우러진 컨테이너 놀이터를 연다. 네프론에 적립된 포인트를 쓸 수 있는 공간이다. 이름은 'Supbox(숲박스)'. 영화를 보고 디지털 체험을 할 수 있다.

김 대표는 "네프론은 물론 폐기물로 만든 예술 작품 등이 전시되는 시민들의 공간입니다"라며 "Supbox는 사용자들과 소통하며 차차 역할을 찾아갈 생각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수퍼빈은 올해 전국 지자체 및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네프론 보급을 늘리면서 향후 보급 대상을 민간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진욱 한경닷컴 기자 showg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