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인물 만들어 '함정 수사'
360곳 중 48곳 채용 의사
"제대로 된 검증 없어 허점 노출"
사이언스와 네이처 등 거대 학술지의 권위에 도전하며 누구나 쉽게 새로운 논문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등장한 오픈액세스 학술지가 늘면서 사이비 학술지도 함께 기승을 부리고 있다.
라타르지나 피산스키 영국 서섹스대 교수 연구진은 그 심각성을 살펴보기 위해 ‘함정 수사’에 들어갔다. 연구진은 2015년 가상 인물인 슈스트 교수를 만들어냈다. 가짜 홈페이지와 이력서를 꾸미고 인터넷 사진판매 사이트에서 슈스트 교수의 얼굴 사진도 샀다. 연구진은 이 가짜 이력서를 무작위로 추출한 360개 오픈액세스 학술지에 보내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지원했다. 이 중 48개 학술지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학술지 네 곳에선 편집장 제의까지 왔고 두 곳에선 새로 간행될 학술지 편집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피산스키 교수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가짜 학술지에서 받은 메일에는 ‘매우 유명한 연구자’나 ‘초청하고 싶다’는 식의 아첨이 들어 있다”며 “상식적인 학술지들이 하는 동료 평가 과정도 거치지 않고 논문을 내준다”고 말했다.
이덕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서강대 화학과 교수)은 “과거에는 학술지 출판에 많은 돈이 들었지만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간단한 소프트웨어로 몇 가지 문장을 입력하면 진짜처럼 논문을 낼 수 있다”며 “적지 않은 연구자가 직업을 유지하고 진급과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려할 점은 과학 선진국에서조차 이런 부정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선 2012~2015년 공식적으로 30건의 연구 부정행위로 논문 등이 철회된 것으로 집계됐다. BBC가 정보 공개청구를 통해 분석한 결과 영국의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러셀그룹에 속한 24개 대학 중 23개 대학에서만 2011~2016년 최소 300건의 부정혐의가 제기됐다.
국내에서도 연구 부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허점이 많다. 한국연구재단은 각 대학의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등에 보고된 부정행위 외에 연구자 개인이 해외 사이비 저널에 함량 미달의 논문을 낸 경우 이를 감시할 수단이 없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냈다가 철회된 논문도 2014년 16건에서 2015년 42건, 2016년 49건으로 늘었다. 세계 과학계가 가짜 연구와 사이비 저널에 민감해하는 이유는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해 연구개발(R&D)을 줄이려는 나라가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올해 정부 R&D 예산을 19조1000억원 편성하는 등 해마다 연구비가 증가했지만 내년 사상 처음으로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