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엄낙용 회고록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래 자서전 쓰기 교양강좌를 열었는데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사실과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자전적 글쓰기법을 배우거나, 개인의 삶의 역정과 가족사 정리하기 등에 대한 직업 문사들의 지도를 받아 실제로 자서전을 펴낸 경우도 적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의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얘기일 것이다. 지금 70~80대의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적 삶을 시작해 IT혁명 시대를 거치며 소위 4차 산업혁명기에 서 있다. 그만큼 사연들도 다양할 법하다.

회고록, 회상록, 참회록, 고백록, 자전적 소설이 모두 자서전과 같은 범주에 해당된다. 특별히 정해진 규범도 없고 분량이든 서술 방식이든 형식도 자유롭다. 물론 ‘진솔한 고백’ ‘솔직한 기술’은 기본 중의 기본이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톨스토이의 참회록, 간디의 자서전은 한 개인의 고백을 넘어 고전이 됐다. 히틀러는 옥중의 자서전 ‘나의 투쟁’으로 나치 집권 기반을 마련해 세계전쟁으로 달렸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긴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자기 자랑을 넘어 왜곡된 기억을 풀어내는 자서전이라면 독배도 될 것이다.

자서전 쓰기는 본인의 삶을 남기려는 인간의 기록본성일지 모른다. 한자문화권의 동양에서는 자서전이 흔하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람의 일생을 쓰는 전(傳)은 원래 역사서의 열전에 수록되던 것이어서 객관적인 서술과 평가가 필수요건이었고, 이런 전통에서 스스로를 서술하고 평가해야 하는 자서전이 발달하기는 어려웠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분석하고 있다. ‘한중록’을 비롯해 조선시대 여성들의 회고록 형식 글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도 여성들의 삶은 공식적인 평가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은, 불평등 사회의 소산이라는 평가도 그럴듯하다.

선거라도 앞두면 자서전류가 범람하는 것도 한국적 현상이다. 웬만큼 직급을 지냈다 퇴직하면 비슷비슷한 무용담을 쓰는 게 한국 공무원의 행태다. 재정경제부 차관을 지낸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가 막 펴낸 회고록은 조금 달라보인다. 고시합격 후 1970년 첫 발령지 묵호세관에서의 잇단 촌지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도 신뢰를 준다. 공직 30년, 대학강의 15년을 담은 《한 공직자의 경제이야기》(나남)다.

주목되는 대목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 사건이다. 주변 인사들이 다칠 것을 우려하면서도 고민 끝에 국회증언을 한 사연이 소개돼 있다. 관계자도 익명이고 짧은 회고지만 용기를 내기까지 인간적 번뇌에 공감이 된다. 사실 대북송금 문제에서는 용기 있는 고백이 더 나오면 좋겠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