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이 시청률 하락을 이유로 진행자를 코미디언 김신영에서 남희석으로 변경했지만 아직은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MC를 변경한 지 갓 한 달이 된 상태라 추이는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국노래자랑'은 남희석이 MC로 처음 나선 3월 31일 방송에서 시청률 5.5%를 기록했다.이후 4월 7일 6%, 14일 5.9%, 21일 6.8%로 소폭 상승세를 보였으나, 28일 5.1%로 주저앉았다. 김신영이 올해 진행한 회차(5.1%~6.9%)와 비교해도 가장 낮은 수치다. 남희석이 진행한 5주간의 평균 시청률은 5.8%였다. 김신영이 진행을 맡았던 1년 5개월간의 평균 시청률 4.9%보다는 높지만, KBS가 MC 교체 이유를 밝히며 공개했던 송해의 1년간의 평균 시청률 9.4%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 특히 김신영이 올해 들어 5~6%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MC 변경으로 큰 효과를 누리지 못한 셈이다.다만 김신영의 경우 '전국노래자랑'의 산 역사와도 같은 송해의 뒤를 잇는다는 후광 효과가 있었고, 남희석은 KBS가 급하게 진행자를 변경하고 김신영과 충분히 소통하지 않았다는 등의 잡음이 있었기에 눈에 띄는 초반 시청률 상승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앞서 KBS는 송해의 뒤를 이어 '최초의 여성 MC'로 김신영을 발탁했으나 1년 5개월 만에 돌연 교체를 선언했다.교체 이유로는 '시청률 하락'을 꼽았다. 당시 KBS는 "시청률 하락이 MC 한 명으로 인한 것임은 결코 아닐 것이나, 44년 전통의 프로그램 위기 앞에 타개책의 일환으로 MC 교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소통 없는 일방적 하차 통보였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
어김없이 봄입니다. 잠시 눈을 들어 자연이 풀어놓은 선물을 즐겨볼까요. 비죽 튀어나온 노란 잔머리 같은 개나리, 콧속을 가득 메우는 매화 향기, 바람에 포르르 흩날리는 연분홍 벚꽃잎까지. 봄에만 느낄 수 있는 설렘과 생명력을 담은 클래식 음악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에이나우디 - 프리마베라 예술사를 통틀어 배부르고 등 따셨던 예술가가 몇이나 될까요. 이탈리아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는 금 수저를 넘은 다이아몬드 수저 예술가입니다. 조부인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이탈리아 대통령을 지냈고, 아버지는 유명 출판업자, 본인은 2021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더 파더’, ‘노매드랜드’를 포함하여 80편이 넘는 티비 시리즈,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등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곡가입니다.명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메인 테마의 집요한 반복,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돌연 극적으로 펼쳐지는 전개 등이 그의 음악의 특징입니다. ‘프리마베라’에서도 이 공식이 매력적으로 사용되고 변주됩니다.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노작곡가는 사진 찍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완벽한 앵글을 잡아야 하고, 빛을 완벽하게 다뤄야 하는 사진이라는 장르가 작곡에 대한 영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몇 년 후에는 그의 음악과 함께 사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에이나우디 <프리마베라>] 그리그 - 서정 소품집 3권 작품번호 43-6번 '봄에게' 작곡가 그리그는 일생 전반에 걸쳐 피아노를 위한 단편들을 '서정 소품집'이라는 제목 아래 66개 작곡한 후 총 10권으
50년.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인 김창열 화백(1929~2021)이 ‘물방울 그림’을 그리는 데 쏟은 시간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50년씩이나 질리지도 않고 한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냐고. 그에게 물방울은 어떤 의미였냐고.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김 화백의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다. 김 화백의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9년 작품까지를 망라하는 그림 38점이 나왔다. “물방울은 그냥 물방울”김 화백이 물방울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미술 운동의 선두에 서며 두각을 드러냈던 김 화백은 세계 미술계에 직접 도전하기 위해 1965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동양에서 온 무명 화가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훗날 김 화백은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 때를 “악몽 같았다”고 회고했다. 1969년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새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김 화백은 그림을 그린 캔버스를 재활용해 또다른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물감이 떨어지기 쉽도록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려뒀다. 그러던 1971년의 어느날 아침, 김 화백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캔버스 표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에 새삼 눈을 떴다. “그때 물방울을 만나고 존재의 충일감에 몸을 떨었다”고 생전의 김 화백은 회고했다.이후 그는 캔버스에 물방울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물방울 연작은 1972년 첫 전시 직후부터 프랑스와 한국 미술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