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몰라서 쉬지 못하지만, 식물이 쉬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쉬도록 하게.”

1950년대 채소와 과수 연구를 주도하던 국립중앙원예기술원(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연구원들은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봉급이 적어 월세도 내지 못하는 직원도 수두룩했다. 결국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기술원 원장이던 우장춘 박사의 반응은 단호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우 박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수행한 홍영표 박사(88)는 “우 박사는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봤다”며 “연구가 힘들어 떠나는 사람은 막지 않고 오는 사람도 막지 않는다는 게 그의 좌우명일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당수 제자는 그가 무뚝뚝하지만 잔정이 많은 인물로 기억한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는 귀국길에 연구원에서 막일을 대신해주던 애주가 인부를 위해 정종 두 병을 짐 속에 꼭꼭 숨겨 넣어온 일화는 유명하다.

우 박사는 귀국 전부터 이미 ‘스타’였다. 그는 일제 치하 조선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도쿄제국대를 졸업한 뒤 농업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농림성 연구원, 교토 다키이연구농장장을 지낸 거물급 인사였다. 1950년 귀국한 뒤 줄곧 채소의 자급 자족을 위한 연구에 헌신했다.

대학 졸업 후 우 박사가 이끌던 원예시험장에서 과수 연구를 한 김종천 박사(84)는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보여준 ‘정중동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뛰어난 관찰력과 책임감을 지닌 학자였다. 그는 매일 오전 온실을 돌아다니며 수백 종이 넘는 식물을 둘러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 후기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무관이던 우범선의 아들이었다. 일부에선 우 박사가 평소 아버지의 과거 행위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아버지 일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다만 그가 일본에서 조선 청년을 위해 농업 교육을 하고 귀국 후 한국의 농업을 일으키기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 박사는 한때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 씨 없는 수박의 개발자는 우 박사와 친분이 있는 기하라 히토시 일본 교토대 박사였다. 홍 박사는 “종자 개념을 몰랐던 농민에게 그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직접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시연하다 보니 와전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업적은 지금도 우리 식탁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195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배추는 이파리만 크고 맛이 없었지만, 그의 노력으로 태어난 배추 원예 1호와 원예 2호가 나오면서 병충해에 강하고 맛도 있고 속이 꽉 찬 배추를 식탁 위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양파와 고추 역시 그의 노력으로 지금의 맛을 지닐 수 있었다. 우 박사는 꽃이 언젠가 국민의 감성을 치유할 시대가 온다고 예상했다.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카네이션도 그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꽃이 됐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