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표방한 영국의 복지국가 모델은 한때 많은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한국 교과서에 소개됐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복지모델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판치면서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재정 적자만 늘린 게 아니었다. 근로의지, 투자의욕, 기업가 정신을 크게 약화시키는 영국병(British disease)을 낳고, 종국에는 국민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다.

'복지정부' 역할했던 의적 로빈 후드…시장 위축·세수기반 약화 '부메랑'
그래도 영국은 때마침 마거릿 대처(1925~2013)라는 구국 결단의 리더십을 갖춘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1979년 집권한 대처 총리는 기득권층의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의 개혁을 통해 영국병 치유에 나섰다. 여기까지는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 그런데 1979년 대처가 선거에 승리했을 때 언뜻 뜬금없어 보이는, 그러나 복지 국가의 한계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로빈 후드 논쟁’이 일었다. 그해 5월 대처가 선거에서 승리한 뒤 한 언론사에서 ‘영국의 유권자가 로빈 후드를 체포했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기 때문이다.

로빈 후드는 한국의 홍길동처럼 중세 영국에서 전설적인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로빈 후드는 그 일당과 함께 셔우드 숲 속에 숨어 있다가 근방을 지나는 귀족과 승려, 상인을 습격하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줬다. 어떤 면에서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복지 정부’의 역할을 한 셈이다.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이 아니라 강압과 약탈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소득 재분배라는 원리는 오늘날의 복지 정책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로빈 후드는 재산의 가치보다 세금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오늘날의 누진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통행세를 매겼다고도 한다.

그런데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로빈 후드와 그의 사회주의 친구들을 의적이라 할 수 있을까. 로빈 후드는 영국의 복지정부를 상징한다. 로빈 후드의 정의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사회에 더 많은 해악을 끼쳤다는 게 경제학적 평가였다. 영국의 복지정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율과 조세 수입은 역 U자형 관계에 있다는 래퍼 곡선 이론으로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을 뒷받침한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래퍼는 로빈 후드를 아예 악당으로 치부한다.

그 이유는 상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상인들이 셔우드 숲길로 다닌 까닭은 편리함과 비용 면에서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적이 출몰하면서 그 길은 더 이상 안전하지도, 비용 효과적이지도 않게 됐다. 운이 좋으면 무사통과할 수 있겠지만 로빈 후드가 열심히 일할수록 그 확률은 낮아진다. 그래도 그 길로 가겠다면 상인들은 산적들이 넘보지 못할 만큼 호송병을 많이 고용하거나 아니면 셔우드 숲을 멀리 우회하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맞서거나 피하거나 어느 경우든 상인의 비용은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당연하게 비용 상승분은 가격에 반영됐고, 소비자들은 로빈 후드가 없을 때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부담해야 했다.

그렇다면 셔우드 지역 주민으로선 로빈 후드에게 나눠 받은 전리품의 가치와 가격 상승으로 인한 손실 중 어느 것이 더 클까. 초기에는 공짜(?) 전리품의 가치가 더 높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로빈 후드의 활약에 셔우드 숲을 지나는 상인과 물동량은 점차 줄어든다. 약탈 대상 물량과 기회는 갈수록 줄고 그에 따라 나눠 줄 물량도 감소한다. 조세 부담이 높아지면 시장교환과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세수 기반이 약화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로빈 후드 시스템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로빈 후드는 약탈에 성공하면 마리안, 리틀 존과 한바탕 자축연을 열었다. 그렇게 자기 집단을 유지하고 내부 결속하는 데 비용을 쓰고 나머지를 나눠 줬다. 100을 거둬 100을 나눠 줘도 전체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을 판인데, 소득 재분배 또는 복지 전달과정에서 상당한 누수가 발생한 것이다.

'복지정부' 역할했던 의적 로빈 후드…시장 위축·세수기반 약화 '부메랑'
로빈 후드에 대한 재평가는 복지국가가 직면하는 딜레마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많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고부담-고복지’의 모범적 성공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높은 조세 부담 때문에 기업가 정신은 급격히 약화되는 반면 복지 수혜를 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스웨덴에서 조세 지원을 받는 사람은 1960년 약 110만명에서 2002년에는 약 400만명으로 급증했다. 반면 시장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은 같은 기간 약 290만명에서 250만명가량으로 감소했다. 복지재원 공급자 대비 수혜자 비율이 1960년 0.38에서 2002년 1.63으로 급증했다. 배보다 배꼽이 1.6배나 더 커진 기형적 구조가 지속 가능할 수는 없다.

복지 정책의 본질은 계층 간 또는 세대 간 소득을 비자발적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비자발적 소득 이전은 부자연스러운 제도며, 로빈 후드의 예화에서 보듯이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를 수반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복지는 사회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관건은 정치적 단견주의에 쏠려 복지 제도가 지속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 과잉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1830년께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토크빌은 다수결 투표 원칙에 기초한 정치 체제에서는 항상 복지 수요가 과잉으로 흐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며 경계한 바 있다. 토크빌의 경고는 21세기 한국에도 그대로 유효할 것이다.

래퍼 곡선이란
과도한 세율, 세수 감소시켜…레이건 행정부 감세정책 뒷받침


래퍼 곡선은 미국 경제학자며 지금은 래퍼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아서 래퍼가 주창했다. 세율과 세수는 역(逆)U자 관계에 있음을 곡선으로 보여주는 이론이다.

세율을 올리면 세수가 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한국에서도 복지지출에 필요한 재원을 만들려면 세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증세 논리가 퍼져 있다. 그러나 래퍼 곡선은 세율이 지나치게 높으면 오히려 세수가 감소한다는 이론으로, 공급주의 경제학 및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감세 정책을 뒷받침했다.

'복지정부' 역할했던 의적 로빈 후드…시장 위축·세수기반 약화 '부메랑'
좀 더 자세히는 세율 t와 조세수입 R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래퍼 곡선(그림)이다. 이 그림은 세율이 낮을수록 노동, 저축, 투자의욕이 높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세율이 0%면 사람들의 경제활동 인센티브는 높지만 세금을 내지 않으니 조세수입은 제로(0)다. 여기에서부터 세율을 점점 높이면 어느 수준까지는 세수도 증가한다.

그러나 세율이 일정 수준(t*) 이상으로 넘어서면 사람들은 일하는 만큼 돌아오는 몫이 적다고 판단하면서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세수도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세율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까지 감안해 조세수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 세율은 ‘t*’가 된다.

래퍼 곡선에서 어떤 나라의 세율이 t*보다 높은지는 검증의 대상이다. 래퍼는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세율이 적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하면서 세수를 늘리려면 세율을 인하해야 한다는 역발상 논리를 제시했다. 이 논리는 감세 정책을 통해 미국 경제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잠재적 공급 능력을 증대시키려는 레이건 행정부의 이론적 토대로 활용됐다.

래퍼는 최근 스티븐 무어 헤리티지재단 수석이코노미스트와 공동으로 ‘미국 주(州)정부의 경제성장 원인’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래퍼는 미국에서 개인 소득세가 없는 9개 주와 개인 소득세율이 높은 9개 주의 지난 10년간 인구·고용·생산·개인소득 증가율을 비교해보니 예외 없이 소득세가 없는 9개 주가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며, 낮은 세율이 경제 활성화의 밑거름이라는 주장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