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13월의 세금폭탄'의 불편한 진실
민심이 흉흉하다. 졸지에 ‘13월의 보너스’가 아니라 ‘13월의 악몽’ ‘세금 폭탄’을 맞게 된 납세자들이 속출하며 반발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급기야 조세저항 사태까지 우려되는 지경에 이르러 정부와 여당은 자녀세액공제 등 공제 대상 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개선안에 합의하고 여야 합의를 거쳐 소급 적용을 추진키로 했다. 나라의 세정(稅政)이 이렇게 허둥대며 번복되는 광경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원한다면 미리 더 많이 세금을 떼어 연말 환급액을 늘리면 된다며 발을 빼는 정부 당국자의 말에 사람들이 왜 분통을 터뜨렸을까. 정부가 ‘증세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자영업자나 고액자산가는 놔두고 만만한 월급쟁이의 ‘유리지갑’만 털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다. 공약 이행을 위한 증세의 불가피성을 진솔하게 실토했더라면 불편했을지언정 그토록 배신감,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이번 연말정산 논란은 경제 살리기에 악영향을 끼칠 정치적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다. ‘골든타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내수를 살려야 하고 내수를 살리려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게 만드는 한편 근로자들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진작시켜야 하는데 이 엄중한 시점에 산통을 깨버린 것이다. 한쪽에서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봉급생활자들의 소비 의욕을 꺾어 내수 위축을 가져오는 엇박자를 낸다. 이러니 국민이 정부를 믿겠는가.

국민이 가진 가장 중요한 지위가 납세자 지위다. 이를 토대로 국가와 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권능이 나오기 때문에 국민주권보다도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힘을 가진 것이 납세자주권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조세 문제가 역대 대통령 선거나 총선에서 다른 요인들, 가령 지역주의, 병역이나 이념 문제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납세자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한, 한국 정치·민주주의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이번 사태로 그런 경향이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일까.

납세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기존의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거나 공제 항목과 기준을 변경하는 것도 중요한 조세정책의 변화다. 이득을 보는 사람들보다는 손해를 보는 쪽에서 늘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세상사 이치지만, 정부가 과연 납세자들에게 얼마나 진솔하게, 소상하게 배경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는지 의심스럽다. 세수확보에 혈안이 돼 세제개편 관철에 매달리다 보니 납세자 설득은 뒷전이었고 결국 화근을 키웠다.

늘 그렇듯 진실은 불편하다. 구멍 난 세수를 메우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젠 제 아무리 꾀 많은 관료라도 슬쩍 거위 털 뜯듯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미 세제개편 내용을 알렸고 국회에서도 논의됐는데 막상 시행 시점에 불만을 터뜨린다며 억울해 할 일도 아니다. 정부가 어떤 정책, 어떤 목적과 효과를 위한 정책수단을 쓰는지 국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책 홍보와 설득에 더 많은 노력을 쏟을 문제지 국민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납세자들은 잘 모르니 전문관료나 의원들에게만 맡길 문제도 아니고 무슨 ‘무소의 뿔처럼’ 정부 혼자서 가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 아니다. 실제 당해 봐야 버릇을 고친다는 투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민심 이반만 악화시킬 뿐이다.

정부뿐 아니라 국민도 이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 나라의 일이 개개인의 생활에 이렇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번만큼 극명하게 드러낸 경우가 있을까. 그러니 이제 납세자들이 각성해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목적, 이유로 얼마나 세금을 거둬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는지 판단을 내리고, 잘 판단이 서지 않으면 캐물어서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 사람을 선택하는 성숙한, 책임 있는 시민이 더 많아져야 한다. 바로 그런 나라가 우리가 희구해온 선진국이 아닐까.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