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억 돈세탁 창구된 비과세 보험
탈세로 모은 불법자금 500억원을 비과세 보험 상품을 활용해 세무당국의 추적을 피해온 인쇄업체 대표와 이 자금의 관리를 도와주며 수년간 ‘보험왕’을 차지한 유명 보험설계사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세무당국에 납입 내역을 통보할 필요가 없는 비과세 보험 상품이 불법비자금 조성 창구로 활용된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은 모든 보험사를 대상으로 거액의 보험계약에 대한 점검에 나설 예정이다.

◆600개 보험상품 가입…추적 피해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법인 매출자금 37억원을 개인 용도로 쓴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로 인쇄업체 대표 L씨(69)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3일 발표했다. 경찰은 L씨의 불법자금을 관리하면서 보험 가입 대가로 금품을 제공한 혐의(보험업법 위반 등)로 S생명 보험설계사 Y씨(58)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K생명 보험설계사 G씨(58)는 불구속 입건했다.

인천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하는 L씨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무자료 거래 등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 500억원가량을 벌어들였다. L씨는 세무당국에 통보되지 않는 비과세 보험상품 600여개에 가입해 이 자금을 관리해 왔다. L씨는 만기가 오면 다른 보험 상품으로 갈아타는 수법으로 세무당국의 추적을 피해왔다.

경찰 조사 결과 L씨는 캐나다 영주권자 신분을 이용해 세금포탈액 500억원 중 234억원 상당을 재산반출 신고를 거쳐 2011년 캐나다로 빼돌렸다. L씨의 세금포탈 중 대부분의 자금이 공소시효 10년을 지났고, 연간 포탈세액도 3억원을 넘지 않아 형사 처벌이 불가능하다. 경찰은 이런 이유로 법인 매출자금 37억원에 대해서만 혐의를 적용했다. 공소시효가 남은 200억원가량에 대해서는 국세청에 과세 통보할 방침이다.

◆‘보험왕’이 비자금 관리?

L씨의 비자금 관리에는 유명 보험설계사들도 연루됐다. Y씨와 G씨는 탈세를 통해 벌어들인 인쇄업자의 비자금을 관리해주면서 막대한 실적을 쌓아 수년간 ‘보험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이들 설계사는 L씨에게 보험가입 대가로 5억7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행법상 보험가입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10년 연속 보험왕을 차지한 Y씨는 L씨의 보험상품 400여개를 관리하면서 보험상품 200여개를 해약, 보험금 101억원 가운데 약 60억원을 빼돌려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투자용도로 쓴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 Y씨는 “정당하게 보험계약을 맺고 유지만 했을 뿐 보험금 횡령이나 고객돈으로 부동산을 구입하지 않았으며 불법자금 관리 등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G씨도 “거액의 보험계약 체결 대가로 관례상 일정 부분 답례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S생명과 K생명은 “보험사와 설계사는 위촉관계이기 때문에 설계사의 영업 활동을 일일이 보험사가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비자금 은닉에 보험상품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금융당국은 모든 보험사를 상대로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이번 사건처럼 특정 설계사를 통해 다수의 거액 보험계약이 한꺼번에 체결된 경우 자금 출처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겠다는 취지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불법자금 관리라는 새로운 형태로 악용되는 사례가 적발된 만큼 보험사별로 설계사 영업과 거액 다수의 저축성보험을 철저하게 점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태호/김은정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