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삼립빵의 추억
삼립 크림빵이 처음 나온 게 1963년이었으니 꼭 50년 전이다. 국내 최초 자동화설비로 생산됐다는 것도 큰 의미였지만 무엇보다 구멍이 송송 뚫린 빵 사이의 하얀 크림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코 묻은 돈으로 한 개를 사서 둘이 나눌 땐 크림이 많은 쪽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했다. 지금까지 17억개나 팔렸으니 가히 ‘국민빵’이라 부를 만하다.

크림빵은 허름한 시골 빵집을 글로벌 그룹으로 키운 한국 제빵산업의 주역이기도 하다. 1945년 황해도 옹진에서 상미당이라는 빵집을 시작한 고 허창성 회장은 1948년 서울 을지로로 자리를 옮긴 뒤 1959년 삼립제과공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후 맛의 완벽주의를 표방한 그의 열정에 힘입어 크림빵은 하루 15만개나 팔리는 효자상품이 됐다. 단일 브랜드로 최대 판매량이며, 한 줄로 세우면 지구를 다섯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다.

일본식 국화빵(와플)과 ‘앙꼬빵’에서 카스텔라, 케이크,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아티제, 효모빵으로 이어지는 국내 빵의 변천사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구로공단 야근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며 우리 경제를 살찌웠다는 점에서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삼립식품을 모기업으로 성장한 SPC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3조4500억원에 이른다. 중국과 미국 베트남에까지 수많은 지점에서 빵을 팔고 있는 국제적 기업이 됐다.

엊그제 크림빵 2400개가 독일로 공수돼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의 콧등을 시큰하게 했다고 한다. 반세기 전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로 떠났던 이들에게 ‘동갑내기 국민빵’이 고국의 추억과 그리움을 선물한 것이다. 파독 근로자 50주년 기념공연 ‘이미자의 구텐탁, 동백아가씨’ 현장에서 초로의 동포들은 ‘눈물 젖은 빵’과 함께 가난하던 시절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크림빵이 등장한 1960년대 초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6달러에 불과했다. 필리핀 170달러, 태국 220달러였다. 유엔 120개국 중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그 상황에서 간호사 1만여명과 광부 8000여명이 보내오는 돈은 연 5000만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2%나 됐다. 이를 담보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맛이란 신체의 모든 감각을 통해 추억으로 저장된다. 몸에 좋은 음식은 약과 같다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원리를 닮았을까. 추억의 맛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먹던 크림빵은 또 어땠는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