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농부…'책 씨앗' 뿌리는 책농사꾼이죠"
“책이 도착했습니다. 반년이나 걸렸네요. 한국에서 온 책들이 컨테이너에 실려 배로, 그리고 내륙운송 1400㎞의 험로를 거치다 보니 늦어졌습니다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해 어느 봄날, 서울 논현동 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이하 해동협) 사무실로 날아든 편지 내용의 일부다. 발신자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한인회장 서상태 씨. 1년이면 수십통씩 이런 편지를 받는 손석우 해동협 이사장(69·사진)이지만 매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래서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손가락이 부르틀 정도로 힘들어 그만두고 싶기도 하지만 책을 받은 동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죠. 해외 동포들에게 보낼 책 좀 기부하라고….”

올해로 14년째, 무려 90만권이 넘는 책을 나눠준 손 이사장. 최근 해동협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검게 그을린 피부에 거친 손마디가 영락없는 농부였다. “본래 꿈이 농사꾼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정치판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이젠 진짜 농사도 짓고 무엇보다 세계에 나가 있는 700만 해외 동포에게 ‘책 씨앗’을 뿌리는 책농사를 짓고 있지요.”

손 이사장이 해외 동포들에게 책을 처음 보낸 것은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현재 민주당) 홍보부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충북 영동 산골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농촌생활 개선을 위한 청소년단체인 ‘4H클럽’에 가입해 군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주변의 권유로 자연스레 정계에 입문했다. ‘금배지’를 달지는 못했지만 30년 넘게 야당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현장 정치인으로 살았다. 그러기를 30여년, 농부의 꿈을 놓지 않았던 그는 2000년 브라질로 떠났다. 당시 브라질은 농업이민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약 한 달간 머물며 농장터를 살펴보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글학교의 텅 빈 도서관이었다. 별생각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보던 책 두어 박스 보내겠노라”고 교장에게 이야기하고는 귀국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약속을 했으니 책을 보내야 했는데 진짜 두 박스만 보낼 수는 없었죠. 지인들에게 무조건 책 좀 달라고 했죠. 정치할 때 쌓은 인맥이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몇 달 만에 약 3만권이 모였어요. 브라질에 보내고 남은 것은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동포에게 보냈지요.”

이후 손 이사장의 명함이 ‘사단법인 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 이사장’으로 바뀌었다. 노후를 대비해 안성에 사놓았던 땅과 집은 해외 동포들에게 보낼 책 창고로 용도 변경됐다. 입소문이 나면서 주변에 응원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동향인 이필우 전 국회의원은 7년째 사무실을 무상임대해주고 있고,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캠페인을 벌여 지금까지 50만권이 넘는 책을 모아줬다.

브라질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해외와 국내 군부대, 시골 학교 등으로 나간 책은 90만여권. 100만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책입니다. 조국에서 보내온 책이 작게는 동포들의 향수를 달래주고, 나아가서는 모국을 이해하고 애국심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칠순 노인의 눈빛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반짝였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