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도어록
얼마 전 점심식사를 하러 단골 식당을 찾던 중 봄꽃이 만개한 거리를 슬쩍 걸어봤다. 하얗게 핀 벚꽃을 보고 있자니 봄이 온 것이 그제야 느껴졌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두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도착한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주말에 산에 가서 직접 캐와 무쳐낸 것이라며 자랑스레 봄나물 한 접시를 내왔다. 평소 무뚝뚝하던 아주머니도 흥에 겨워하는 것을 보니,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봄이 오긴 왔나 보다.

매년 봄이 오면, 활기가 넘쳤던 나의 어린 시절 농촌의 모습이 떠오른다. 옆집, 앞집, 뒷집 할 것 없이 동네 어르신들 모두 서로의 밭일, 논일을 하러 나가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 대문을 걸어 잠근 집은 없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서로의 집을 거리낌 없이 오가며 삶아놓은 감자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며 놀곤 했었다.

요즘은 어느 누가 집을 비운다고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웃집에 잠시 빈집을 봐달라며 부탁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손주 녀석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는 잽싸게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손주 녀석은 누가 쫓아 들어올까봐 겁이 나서 그런단다. 간혹 열쇠를 잃어버렸다며 옆집 초인종을 눌렀던 풍경도 먼 옛날 일만 같다.

며칠 전 만난 친구놈이 집 현관문에 최신 도어록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꽤나 신이 난다는 듯이 말했다. 건망증이 심해져 열쇠를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럴 때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며 네 자리 숫자만 알고 있으면 열쇠 걱정은 물론 도둑이 열쇠를 줍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떨 필요도 없어 이만큼 편리한 게 없다는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니, 도어록과 같은 삶을 편리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들이 우리들의 삶을 더 개인주의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품앗이 농사를 지으며 서로의 아이들을 돌봐줬던 옛 농촌의 풍경처럼, 서로에게 끼치는 폐를 통해 남들과 소통하며 그 안에서 관계가 시작됨을, 이러한 ‘폐 끼치는 삶’이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삶보다 더 값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결국 도어록은 안전한 방범장치와 편리성으로 각광 받고 있지만, 개개인의 사회성엔 제대로 족쇄를 채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창선 < 중흥건설 회장 kyj466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