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은 물적 토대의 지배를 받는다. 소위 경제 결정론이다. 그러나 때로는 관념의 지배도 받는다. 한번 오도된 길로 들어서면 좀체 다른 증거가 드러나도 노선을 바꾸지 않는다. 신념 체계는 의외로 완고하다. 종북(從北) 쓰레기도 그런 종류의 하나다. 이념은 복잡한 현실을 편리하게 해석하는 일종의 패턴화된 사고다. 따라서 인지 능력이 떨어질수록 이념의 강령에 매달린다.

오도된 관념 때문에 낭패를 당한 경우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반미감정은 달러의 위력을 언제나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노무현 집권기에 키코(KIKO) 광풍이 몰아쳤던 것은 미국 경제가 결딴났으면 좋겠다는 반미주의자들의 허망한 기대가 만들어낸 집단 착시였다. 미국도 언젠가는 쇠락할 것이라는 일반법칙과, 당장 달러가 휴지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이 둘을 고의로 혼동했다. 결국 달러하락에 베팅하면서 수조원을 날리고 말았다. 미국에 대한 증오가 ‘소고기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 것도 같은 논리다.

70년대 들어서는 자원고갈론이 그랬고 80년대 이후의 지구온난화론도 오도된 관념 체계라는 것이 점차 판명나고 있다. 그렇게 법석을 떨며 이산화탄소()를 규제하는 온갖 장치들이 만들어졌고 유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추워질수록 온난화 때문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 지금도 극성을 부리는 것은 그것이 사이비 종말론과 유사한 자기합리화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념은 자기방어 논리를 재생산하면서 신도들을 마지막 진실의 순간까지 몰아간다.

수십조원이 투자된 태양광산업의 종말이나 이산화탄소 배출권 시장의 붕괴는 지구온난화라는 허구의 이론적 토대 위에 세워졌던 파국적 결과다. 교토의정서 체제의 종말은 지구의 종말보다 당연히 빨리 왔다. 이명박 정부는 아직도 이 신화에 의존한다. 축제 분위기였던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유치는 실은 노인이 바다에서 건져올린 뼈만 남은 물고기 꼴이다. 오조준된 재생에너지 산업은 거의 수십조원의 재정을 낭비해왔다. 대통령과 총리는 국제사회에서 환경지도자적 위상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휴지가 되고만 이산화탄소 배출권은 어떻게 되나. 한때 7달러를 넘나들던 배출권 가격은 지금 5센트다. 유럽은 더 떨어졌다. MB정부는 배출권 시장을 개장하겠노라고 기업들을 윽박질러댔다. 지금 꿀먹은 벙어리다.

이명박 정부는 환경 근본주의에서 시작해서 공정사회와 동반성장의 좌익 프레임으로 옮아갔다. 배출권이나 태양광 소동은 손해액을 계산할 수 있다. 자원고갈론이 만들어낸 소동 역시 계산이 가능하다. 금액은 크지만 구체적이다. 그러나 공정사회나 동반성장론의 폐해는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유시장 위에 길드 사회주의를 심으려는 아주 오래된, 그리고 허망한 발상이다. 좌경화의 뿌리를 87년 대중 민주주의 체제라고 본다면 동반성장까지 25년간의 손해액은 GDP의 장기저성장분으로 역추정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족히 4만달러는 이미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누적 손실액은 수천조원이다.

박근혜 신정부의 국민행복론이나 경제민주화도 좌편향 이념이요 성숙한 숙의 민주주의로부터의 뒷걸음질이다. 행복은 국민의 자유권으로 선포된 것이다. 이 자유권을 정부의 의무요 국민의 청구권이라고 뒤집어 생각한다면 이는 국가주의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4.0으로 진화해야 할 순간에 87체제를 강화하는 모양새다.

잘못된 경제관념은 더욱 위험하다. 구조조정을 미루면서 투자를 늘리고, 정년을 보장하면서 신규채용도 늘리는 그런 기업경영은 불가능하다. ‘이윤 아닌 공동체 가치’라는 말도 주술에 가깝다. 당선인이 중기단체와 전경련을 방문했을 때 보여준 개념의 혼선들이다. 버스와 택시의 갈등조차 갈팡질팡하면서 국민 전체의 이익을 조정하겠다는 것은 주제넘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하얀 꿈이다.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그나마의 방법은 성장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는 5년 전 이때 중도 실용을 내세웠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내거는 경제민주화와 국민행복론은 더욱 혼란스럽다. 눈 내린 새해 아침이다. 그러나 덕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