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한국 근·현대 연극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는 1908년 협률사에서 공연된 이인직의 ‘은세계’를 근대극의 시발로 보는 것이다. 이후 1920년 도쿄 유학생들이 모여 결성한 극예술협회를 필두로 토월회, 극예술연구회 등 신극운동 단체들은 일제의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양식 연극을 이 땅에 심어왔다. 해방 이후 한국이 아시아 최초로 국립극장을 설치한 것도 신극운동가들의 창의와 열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로부터 60여년, 아직도 ‘연극’ 하면 ‘가난’이라는 연관어가 떠오를 만큼 열악한 한국연극사에 과연 황금기가 있었을까? 단순히 관객 호응도만으로 볼 때 국립극장 출범시기가 바로 한국 연극 절정기였다. 지금 서울시의회 건물인 부민관을 국립극장으로 정하고, 1950년 4월29일 개관기념식에 이어 막을 올린 유치진의 ‘원술랑’은 당시 서울시민 170만 중 5만명이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룬다. 이는 이해랑, 백성희 등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덕수궁에서 광화문까지 똬리를 틀 듯 관객이 운집했다는 신문기사, 그리고 1997석 극장에서 하루 2회 공연 등 근거가 있는 수치다. 바야흐로 한국 연극 황금기의 도래를 알리는 청신호였다. 이어진 국립극장 2회 공연 ‘챠오위의 뇌우’ 역시 개관작의 인기를 넘어서는 단기간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너무나 짧았다. 초대 국립극장장 유치진은 국립극장을 연중무휴 공연체제로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그해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1957년 국립극장의 서울 환도 이후 연극은 서서히 활기를 되찾으며, 1960년대 실험 민중 자유 가교 여인 산울림 등 동인제 극단이 잇따라 창단된다. 60년대 초 명동국립극장 재출범, 드라마센터 개관,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페스티벌 모두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신진 극작가, 연출, 평론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연극은 1970년대 성숙기를 맞는다. 나는 이 시기를 한국 연극의 두 번째 황금기로 본다. 드라마센터의 초분으로 후끈 달아오른 연극계에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민중극장의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 등 예술적으로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화제작들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2000년대, 많은 이들이 지원 부족과 관객 부재를 탓하며 연극의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연극의 다양한 시도는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 두드러진다. 1980~1990년대 해외 연극계와의 교류가 시작되며 치열한 내적정련을 거친 연출가들을 포함, 서울에서만 하루 100여편 이상의 연극이 상연되고 있다. 그리고 백성희장민호극장, 게릴라극장을 가득 메우는 관객의 눈망울에서 나는 연극 황금기의 징후를 확인한다. 그래서 명동예술극장 공연 한 편에 서울 인구 1000만 중 0.1%인 1만명의 관객시대를 꿈꾼다. 이는 순수 제작비를 회수하는 하한선이자 유료 객석 점유율 80%를 넘어서는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구자흥 < 명동예술극장장 koo.jahung@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