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언론에도 공개하지 않을 계획이니 돌아가주세요.”

지난 18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 호텔. 행사 장소인 그랜드볼룸 앞을 막아선 경비원들이 참석자들의 이름과 얼굴, 초대장을 일일이 확인했다. 취재 기자임을 밝혔지만, 취재는커녕 행사장 내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철저한 보안 속에 비공개로 진행된 이 자리는 일본 히타치그룹의 한국 진출 50주년 기념행사였다. 일본 본사의 나카니시 히로아키 사장과 나이토 마사카즈 한국히타치 사장 등 주요 임원들이 참석한 자리였지만,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비공개로 진행할 계획은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전만해도 일본 히타치 고위 임원들과 나이토 한국히타치 사장이 국내 언론을 상대로 한국 내 사업 전략과 비전을 발표키로 하는 등 대대적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표이사와 언론의 개별 인터뷰까지 추진하던 상황에서 열흘 전 돌연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한국히타치의 입장이 바뀐 것은 독도 영유권 분쟁과 무관하지 않다. 일본 본사에서 “한·일 통화스와프를 연장하지 않는 등 양국 경제관계가 좋지 않은 만큼, 50주년 행사를 조용히 치르라”고 지시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히타치 관계자는 “미디어 설명회를 취소한 정확한 배경은 밝힐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50주년 기념식을 내부 행사로만 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요즈음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독도 분쟁 이후 코리안 타운에 가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성난 시위대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다. 정치 문제로 시작된 양국 간의 갈등은 이렇게 기업 활동은 물론 개인들의 생활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긴 어려워 보인다. 양국 간 감정의 골이 워낙 깊은 데다, 영토 갈등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일 간의 영토 분쟁은 중국 내에서 일본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렇다고 히타치처럼 숨는 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정치처럼 비즈니스 역시 ‘생물’이다. 평화가 아닌 갈등의 시대에도 기업들은 세상을 탓하기 앞서 소비자들을 위한 새로운 대응 전략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히타치의 50주년 행사를 보는 기분은 그래서 씁쓸하다.

강영연 산업부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