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모였다 하면 군대 얘기가 제일 재밌는 대화 소재다. 전방에서 고생이 심했으면 더욱 인기를 끈다. 약간의 무용담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일품이다. 나는 군 생활을 통해 국가관을 세웠다고 자부한다. 요즘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다. 낳아주신 부모님, 가르쳐주신 은사님, 그리고 군에서 모셨던 지휘관(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동일 항렬에 놓고 ‘종신제’로 존경하자는 국민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나는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총장학(總長學)을 배운 바 없다. 그러나 한남대에서 14대 총장에 이어 15대에 연임하여 5년째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총장업무를 군 생활에서 배운 대로 하니까 성공적으로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1970년 5월 입대해 육군 훈련소 29연대에서 기본훈련을, 27연대에서 후반기 교육(57㎜ 무반동총)을 받았다.

그 후 훈련소 본부중대에 배치돼 정봉욱 소장님 비서실에서 근무하며 교육자료 제작을 맡았다. 그때 정 소장님의 부대운영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현재 86세의 정 소장님께 수시로 전화 문안을 드리며 ‘종신 부하사병’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 소장님은 훈련병 제일주의를 천명했다. “훈련병은 아직 완성된 군인이 아니다. 군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니 기합이나 처벌 대신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군과 육박전이 벌어졌을 때 대한민국과 민주군대가 더 좋다는 확신이 있어야 목숨 걸고 싸우지, 아군이나 적군이나 비슷하다면 왜 목숨 걸고 조국을 지키겠는가”라고 가르쳤다.

훈련을 마치고 기성부대로 배출시킬 때 정직하고 부정이 개입하지 못하게 여러 방안을 도입했다. 신학생들을 뽑아 예비 성직자의 양심을 걸고 정직하게 분류토록 했고 어떤 때는 소장님이 직접 맡아 비서실 사병들이 일일이 대조 확인케 할 때도 있었다.

훈련병들이 여름철 밤에 모기에 뜯겨 숙면을 못한다는 민원을 듣고 부대운영비를 절약, 훈련소 전 생활관에 모기장을 마련해주신 일도 있다. 잔반과 교환해 받은 돼지를 길러 연대별로 매월 훈련병의 생일잔치를 해주고 급양대에서 열무김치 재료를 인수하면 덩굴 속 대나무 밭 위에 펼쳐 물을 뿌려둠으로써 신선도 유지와 영양손실 제로운동을 지시하기도 했다. 자상하실 땐 아버지 같고 엄하실 때는 무릎이 후들후들 떨리게 하는 냉온탕 사기 관리를 하셨다. 1973년 3월 병장으로 제대할 때까지 35개월 정도의 군 생활이 나에겐 대학원 교육 이상의 교육 경험이었다.

현재 그런 군 경험을 토대로 한남대 캠퍼스에 유엔기념공원을 조성, 6·25 참전국과 의료지원국 국기를 연중 게양하고 있고, 참전국 유학생들에게 유엔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매년 호국보훈의 달이 시작되는 6월1일엔 교수 직원 학생간부 및 ROTC 후보생들이 대전 현충원을 공식 참배한 후 사병 묘역과 장교 묘역 대청소를 하고 있다.

국방과 외교엔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민군관학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할 수 있다’는 원로 감독의 말처럼 국방이 완전해야 교육도 있고 기업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일평생 군 존경 운동인 ‘군사부일체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 오늘 하루도 군 생활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신나게 살고 싶다. 군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면 그의 건강과 국가관은 믿어도 된다.

김형태 <한남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