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가 왜 선진 산업국가가 아닌 후진 농업국가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주제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약한 고리 이론’ 등 많은 가설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그리스에서 북쪽으로 선을 그어 이동(以東)지역, 다시 말해 독일 엘베강 동쪽 지역은 동독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중국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이 공산주의에 매혹됐다. 당연히 북한도 포함된다. 아시아적 전체주의 혹은 그리스 정교가 지배하는 대부분 지역은 공산주의에 대한 친화성을 드러냈다.

이들 농업 국가의 근대화는 외부에서 이식되었다. 그래서 대중은 시민이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민이 되었다. 나름대로 산업화 민주화의 길을 걸었으나 그것에 대한 반발심도 깔려있다. 뿌리깊은 농촌공동체적 질서관이 여전히 뇌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 슬로건에서 강력한 유혹을 느낀다.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다.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인간관은 종교나 주자학 같은 전통사회의 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구조적 친화성을 갖는다.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의식과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기어이 전체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

농촌공동체적 윤리관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좀체 뽑아낼 수 없다. 언제나 아름다운 전원적 풍경을 원경(遠景)으로 둘러치고 있기 때문에 향수에 젖은 도시인의 심리적 지원을 받는다. 그런 사고는 우리가 무심결에 ‘충효’가 한국적 가치관의 원형이라고 말할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수파, 애국진영,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조차 학교에서 윤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거나(직업교육이 아니라), 선비정신을 상찬(시민정신이나 법치가 아닌)할 때 숨길 수 없이 그 내면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만다. 이런 태도들은 근대화 정신이 아닌 촌락공동체적 질서 세계에 속한다. 사회윤리와 개인윤리가 아직 미분화상태인 세계에서는 충(忠)·효(孝)가 시민윤리와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충이 효의 단순 연장인 그런 사회를 우리는 낡은 봉건 사회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어버이에게 효를 다하듯이 나라님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주장이라면 민주주의, 자유, 평등, 그리고 자유인들 간의 공정한 경쟁을 핵심 가치로 하는 시장경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윤리를 법치로 대체하지 못하는 사회를 어떻게 근대 사회라고 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중간단계에 머물러 있다. 근대화로 가느냐 봉건적 공동체로 돌아가느냐의 갈림길이다. 이승만이 방향을 잡고 박정희가 근대화를 재촉한 것 외엔 한국정치가 시장친화적이었던 적도 없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도 누가 법치 질서를 확보할 것인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선해보이는지를 경연하는 상황이다.

경제민주화는 기껏해야 결과적 평등에 대한 집착이다. 자유로운 개인 행동과 그것의 결과로서 전체적 삶이 어떻게 개선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구호다. 단순히 가정의 집합이 국가요, 어버이의 확장이 왕이라는 미분화된 의식은 필시 공동체주의에 집착하게 된다. 속된 표현으로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뜯어먹자는 정신의 표출이다. 시장경제를 이해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이 어떻게 지구를 붙들어 매고 있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은 되어야 한다.

경쟁이야말로 공정성의 원천이며(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일견 냉정해보이는 도시가 실은 고도화된 협동 체제라는 것을 촌락 공동체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개인과 전체가 어떻게 다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버이와 정치 지도자를 혼동한다. ‘북한의 어버이’를 생각해보라. 어떤 사람은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의 질병이 만연한다고 해서 그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시대 정신은 미래를 향해 열린 가치를 말하는 것이지 낡은 주자학적 세계로 돌아가자는 좌익적 논변에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시대정신을 다수결로 정할 수는 없다. 싸구려 정치인들은 이념도 아닌 것을 이념이라고 주장하며 경거망동한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