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코리아 해외 '덤핑 전쟁'…협력업체에도 '불똥'
A사는 지난 3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산업시설 플랜트 공사를 15억달러(약 1조6800억원)에 수주했다. 국내 메이저 건설사 4개사가 참여했던 당시 수주전에서 나머지 업체는 A사의 계약금액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예상 수주금액보다 2억~3억달러 밑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A사의 조달시스템 등을 고려하더라도 정상적인 수주 범위를 넘어 밑지는 걸 각오하고 따낸 공사라고 입을 모은다.

○제 살 깎아 먹는 수주전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경쟁이 ‘코리안 워’로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협상자와 4~5위까지 차점자가 한국 업체들인 현장이 대부분인 까닭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중동, 동남아시아 등에서 발주된 플랜트 공장의 경우 입찰 당시 1등부터 5등까지 한국 업체들이 차지한 현장이 수두룩하다.

입찰마감일까지 가장 낮은 금액을 써내 우선협상자(lowest)로 선정된 이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낙찰통지서(LOA)를 받거나, 최종 계약이 이뤄지기 전까지 국내 차순위자들이 우선협상자가 제시한 금액 이하의 조건을 내걸어 발주처와 추가 협상을 벌이면서 순위가 뒤바뀌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 발주처에 휘둘린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중동의 발주처들은 “한국의 E사가 이런 조건을 제시했는데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생각이 없느냐”고 다른 건설사에 타진해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대형업체 관계자는 “일본은 해외 수주 과정에서 자국의 다른 업체가 우선협상자로 선정되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지적했다.

해외 건설사들도 국내 건설사의 수주 관행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컨소시엄 협상을 위해 최근 방한했던 미국 엔지니어링사인 KBR 관계자는 “글로벌 EPC 시장을 한국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는데도 지나친 경쟁으로 시장우위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조언했다.

○‘실적 챙기기’가 주된 요인

해외 건설시장에서 국내 업체 간 저가 수주 경쟁이 펼쳐지는 것은 건설사들이 국내 건설시장이 불황에 빠지자 해외 수주를 통해 외형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오너에게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전문경영인(CEO)들이 무리한 선택에 내몰리는 후진적인 경영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해외건설 시장에서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된 2006년 이후 수주한 물량의 상당수가 완공 무렵인 내년 이후부터 실적 악화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저가 출혈 경쟁 피해는 국내 협력업체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석유화학플랜트 공장용 압력계를 생산하는 H사 관계자는 “5~6년 전부터 발주처에서 단가 인하를 요구해 정상적인 가격에 제품을 납품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납품가를 맞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입찰을 포기하는 현장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신시장 개척, 독보적 경쟁력 갖춰야”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 내용을 들여다보면 화려한 외형과 달리 속 빈 강정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동에 편중된 해외 수주시장을 다변화해 신흥시장을 개척하자는 주장이 그중 하나다. 실제 해외건설 시장에서 후발주자로 꼽히는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원래 발주 물량이 많은 중동 진출을 노렸지만, 저가 수주의 관행이 너무 심해 포기했다”며 “레드오션인 중동을 벗어나 경쟁이 덜 치열한 신시장을 개척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신공법을 개발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구축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조정 노력도 요구된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 소장은 “정부나 협회가 해외 수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실패사례를 제시하는 등 조정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진수/이정선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