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경남 진주고 교무실. 은행에 들어온 지 2년이 갓 지난 29살의 청년이 20여명의 교사 앞에서 카드와 ‘재형저축’ 가입 신청서를 들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교사 대부분이 수업에 들어갔다. 남은 교사들은 평소 때처럼 잠깐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이 청년에게 붙들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카드와 저축상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한 교사가 “가입은 하고 싶은데 당장 돈이 없다”고 하자 이 청년은 “오늘은 일단 신청서만 받아가겠습니다. 다음달 17일 월급날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문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신규 가입 신청서 10여장이 들려 있었다.

26년 뒤 카드업계에서 이용금액 기준으로 1, 2위를 다투는 KB국민카드의 수장이 된 최기의 사장(56)이 국민은행(옛 주택은행) 진주지점에서 행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다. 그는 당시 매일 진주지역 중·고교를 돌며 교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벌였다. 그 결과 진주지점은 국민은행 전체 지점 가운데 실적 1등 지점으로 올라섰다. 최 사장은 “그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행한 행원에게 ‘아웃바운드’(외부) 영업을 시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며 “그때 경험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큰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다니자”

진주 변두리에서 태어난 최 사장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는 부산으로 진학했다.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딱 ‘한 개 반’ 틀렸습니다. 수석으로 입학했어요. 시골에서 돼지도 잡고 잔치를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자취를 하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야 나름 공부를 잘했지만 부산에서는 쉽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부산남고에 들어간 그는 무난하게 고교시절을 보낸 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정치학이 훗날 조직의 리더가 됐을 때 조직 내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지금도 정치학을 배웠던 게 큰 도움이 됩니다. 갈등 관리가 경영의 기본 중 하나니까요.”

대학 1~2학년 때는 노는 데 열중했다.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갔다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3~4학년 학점은 확 끌어올렸다”고 하지만 대한항공 한진해운 MBC까지 줄줄이 최종 면접에서 낙방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3년 주택은행에 입행, 부산지점(현재 지역본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미련이 남았던 탓에 입행 후 부산MBC 기자 공채에 다시 응시했다. 또 최종 면접까지 갔지만 떨어졌다.

그는 이때부터 모든 것을 접고 은행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주택은행이 유일하게 나를 알아봐 준 곳인 만큼 ‘고맙습니다’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다니기로 한 거죠.”

◆동기들 중 가장 먼저 대리, 과장으로 진급

신입행원 시절 은행 창구에서 벌어지는 각종 민원을 능숙하게 처리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민원 처리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긴 고객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되는 건 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얘기하면 쉽게 풀렸습니다.”

1985년 고향인 진주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곳에서 인생의 멘토를 만났다. “3년차가 되면서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갔었죠. 근데 당시 진주지점장으로부터 출납 업무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최 사장은 어느날 “앉아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직접 영업을 뛰어 보라”는 지점장의 지시를 받았다. “오는 손님만 받아도 편하게 장사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지점장부터 발로 뛰면서 고객을 유치해 오는 거예요.” 그가 지역 중·고교 교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게 된 이유다.

최 사장은 그 때 ‘행동의 힘’을 알았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한 번 건드려보고 ‘안 된다’ 싶으면 포기합니다. 저는 일단 방법부터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맞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창원지점으로 옮기고서는 공단을 뚫는 데 주력했다. 현대중공업 등 공단 내 기업들이 발행하는 사보에 은행 상품을 실은 것. 수십명에 달하는 사보 담당자들을 일 대 일로 만나 설득한 결과였다. 지점 실적은 금세 2~3배까지 늘었다. 덕분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입행 동기 중 제일 먼저 대리로 승진했다.

1990년 부산·경남지역본부에서 인사·홍보·총무 담당 대리로 근무하면서 또 한 차례 기회를 맞았다. 당시 주택은행의 청약저축 인기는 대단했다. 청약저축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고객들이 수십m씩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 하지만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건 10분 남짓.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는 고민 끝에 부산KBS 프로그램 ‘라디오에 물어봅시다’의 담당 PD를 찾아갔다. “청약저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코너를 만들어 주세요.”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그는 1년 이상 이 코너를 직접 진행했다. 다른 방송사와 신문사에서도 연락이 몰려왔다. 서울에서 열린 임원회의에서는 “최기의가 누구냐”며 그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1994년 과장 진급까지 전국에서 1순위로 하며 서울 본사 경영기획부로 발령을 받았다.

◆5회 연속 S등급 … 국은인상 수상

1999년 수원 영통지점장 시절이었다. 하루는 출근길에 보니 2층에 있던 지점 위층에 룸살롱이 들어왔다. 문제는 이 룸살롱 간판이 국민은행 간판의 상단 10㎝ 정도를 덮어버린 것. 수원 최대 조폭 조직 중 한 곳이 운영하는 룸살롱이었다.

‘주먹’에 맞서 ‘주먹’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 그는 시청에 행정지도를 바라는 내용을 담아 서면으로 민원을 넣었다. 몇 번을 모른 척하던 시청도 그가 계속해서 민원을 제기하자 결국 룸살롱 간판을 내리게 했다. 집요한 행동주의자의 승리였다.

영업 전략도 남달랐다. 그는 영국 테스코사가 삼성과 함께 문을 연 홈플러스에 은행권 처음으로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설치하고, 지점을 열었다. 실적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마트를 방문하는 주부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킨 덕분이었다. “우선 우리 지점에서 번호표를 뽑습니다. 대기 시간에 맞춰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내려오면 바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었죠.” 국민은행의 홈플러스 입점 전통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그는 2001년 상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 영업 평가에서 5회 연속 최우수 성적인 S등급을 받았다. 전례가 없는 기록을 달성하며 행내 최고 포상인 ‘국은인상’을 받았다.

◆고객 지향 상품으로 업계 1위 탈환

최 사장은 가맹점 수수료 인하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출범 1년 만에 KB국민카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시장점유율 부문에서 최근 몇 년간의 하락세에서 벗어나 출범 5개월여 만에 이용금액 기준 월별 시장점유율 15%대를 회복하면서 꾸준한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체크카드 이용실적 부문에서는 1위 자리를 꿰찼다.

이런 실적은 고객에 대한 고민이 담긴 신상품들이 뒷받침된 결과다. 고객별로 최적화된 포인트 적립이 특징인 ‘KB국민 와이즈카드’와 아파트 관리비 등 생활 밀착 부문에서 할인율을 높인 ‘KB국민 와이즈홈 카드’는 출시 9개월 만에 100만장을 돌파했다. 올해는 단 한 장의 카드로 취향에 따라 혜택을 고를 수 있는 ‘혜담카드’를 선보여 세 달여 만에 12만장 이상을 발급했다.

최 사장은 이런 성과가 모두 임직원과의 소통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사장님, 어제 출타 중이셔서 인사도 못 드리고 퇴사하게 됐네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최근 퇴사한 직원 A씨) “씨 더나은 발전이 늘 함께 하길 바랍니다. ”(최 사장)

최근 안내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사한 한 용역사 직원이 최 사장의 페이스북에 남긴 인사에 대한 답글이다. 그가 직원들 사이에 ‘소통의 CEO’로 유명한 이유다.

최 사장의 남은 바람은 뭘까. 그는 후배들에게 ‘최 선배, 참 괜찮은 CEO였다’는 평을 듣고 싶다고 했다.

김일규/강동균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