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해적물 판칠 때도 저작권 관리…작가에게 강한 믿음줬죠"
김영사와의 첫 만남이 생각난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1992년 직장인을 위한 경영 교과서를 만들어보자는 기획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면서 김영사를 처음 만났다.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작업했다. 1400만부 이상 팔린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는 1998년에 시작했다. 그동안 지켜본 김영사는 나에게 큰 믿음을 주었다.

그때는 저작권에 대한 출판계의 인식과 관리가 지금 같지 않았다.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 출판물들이 아무런 규제나 제지를 받지 않고 성행하던 때였다. 국내 저자들에게는 자신의 책에 인지를 붙여 판매부수를 확인하고 인세를 정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인지를 꼭 붙이겠다는 저자와 믿어 달라는 출판사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강력한 ‘무기’

이런 상황에서 김영사는 놀랍게도 저자가 물어보기도 전에 인쇄해 판매한 책의 부수를 구체적으로 때마다 알려줬다. 물론 인세도 정확하게 지급했다. 다른 작가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대부분 출판사가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지만, 1990년대 국내 출판 상황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사례였다. 이렇게 쌓은 신뢰가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신선하고 강력한 무기라고 믿는다.

나는 원고 작업 외에 출판 이후의 판매 등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나의 모든 저작물을 김영사에서 출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 20년을 지내오며 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1998년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을 출간한 뒤 곧바로 ‘일본편’ 작업에 착수했고, 2004년에는 ‘미국편’, 2011년에는 ‘중국편’까지 마무리해 전 14권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 사이 사이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를 통해 발칸반도, 동남아시아, 중동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했다.《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책으로 엮는 즐거운 작업도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김영사 직원들의 든든한 후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세계적인 소설가 스티븐 킹을 알 것이다. 그의 창작론을 담은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에는 수천만 독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글쓰기의 핵심 비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문장이 있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편집자의 충고를 모두 받아들이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타락한 작가들은 한결같이 편집자의 완벽한 솜씨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神)의 일이다.”

○작가의 일, 출판편집의 영역

킹은 놀랍게도 그의 소설 분량을 줄이고 문장을 잘라내고 주제를 바꾸라고 하는 편집자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랐다. 출간하기 무섭게 전 세계로 번역돼 수천만부씩 팔려나가는 작가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발표하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바로 영화로 만들어지는 비결을 그는 편집자와 출판사의 공으로 돌렸다.

20세기 최고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T. S. 엘리엇도,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강하고 훌륭한 편집자의 지원으로 그들의 최고작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내게도 내 작품을 가장 깊이 꿰뚫고 있고, 어느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영사는 내가 가는 곳,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나를 위해 언제든 먼저 달려와 준비하고 있다. 나도 내 생각과 계획을 가장 먼저 김영사에 알리고 의견을 구한다.

박은주 사장의 탁월한 안목과 리더십은 늘 나를 감동시킨다. 편집팀, 마케팅팀, 디자인팀은 최고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연대감과 가족의식은 나를 더 부지런한 작가가 되게끔 고삐를 당기게 하고 긴장시킨다.

그들을 만나는 날이면 가슴 설레고 기쁘다. 그들과 한 해 마지막을 함께 자축하며 마무리하는 송년회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해오고 있는데, 해마다 새롭고 기쁘고 행복하다. 이런 벗들이 있다는 것이,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들을 통해 나는 독자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었고, 내가 원하는 만화를 꾸준히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작가이기 이전에 김영사의 독자”

김영사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지금까지 20년을 이어온 것은 필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에게 변함없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믿음과 신뢰로 답해왔다. 김영사라는 든든한 울타리 덕분에 다른 데 신경 쓰고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원고 작업에만 집중하고 고민할 수 있는 안복(安福)을 누리고 있다. 나의 오래된 벗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김영사는 매년 크게 성장했다. 대한민국 굴지의 출판사로 자리잡았고 수백 종의 베스트셀러 목록과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이 김영사의 베스트셀러와 큰 작가뿐만 아니라 그들이 꾸준히 키워온 신진 작가들과 양서들에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20년 가까이 한국 호랑이를 찾아 헤맨 기록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스트 박수용 PD의 탐사집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이나, 세계적인 고대 근동 신화학자 고(故) 조철수 박사의 역작 《예수평전》, 신진 전기작가를 발굴해 우리 문화재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 선생의 정신을 조명한 《간송 전형필》 등은 길이 기억됐으면 하는 김영사의 빛나는 도서목록이다. 나 또한 작가이기 전에 김영사의 신간을 기다리며 가슴 두근거리는 독자임을 고백한다.

이원복 <교수·먼나라 이웃나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