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안정’만 고집하던 유럽중앙은행(ECB)이 ‘경기부양’ 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고 있다. 유럽 500여개 은행에 4890억유로(370조원) 규모 대출을 결정한 데 이어 ECB 내에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양적완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재정위기가 해결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 데다 디플레이션(물가가 하락하고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현상) 우려까지 나오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양적완화 두려움 버려야”

ECB도 양적완화 채비…경기부양으로 방향 돌리나
로렌초 바니 스마기 ECB집행이사는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를 갖고 “디플레이션 리스크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에서 커진다면 ECB가 양적완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마기 이사는 “미국이나 영국도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질 때면 양적완화를 시행해왔다”며 “양적완화는 ‘기성복’과 같은 일반적인 정책으로 ECB가 이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적완화를 주저하는 ECB 내부 기류에 대해 “사이비 종교 같은 맹목적인 믿음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ECB가 유로화 발행을 늘리거나 유로존 국채 매입을 적극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

스마기 이사의 발언은 지금까지 나온 ECB 고위 관계자들의 언급 중 가장 수위가 높다. 그동안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를 비롯한 정책위원들은 양적완화라는 표현조차 사용하길 꺼려왔다.

ECB가 양적완화에 소극적인 것은 ECB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독일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독일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를 모델로 만들어진 ECB는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FT는 “이번 스마기 이사의 발언을 통해 그동안 ECB 고위층 내부에서 양적완화를 두고 깊은 논의가 진행됐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양적완화 위한 ‘지원포격’도 늘어

양적완화 수용을 지원하는 ECB 외부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신속하게 돈을 풀지 않으면 유럽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공감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20% 가까이 돈을 푼 미국 중앙은행(Fed)이나 영국중앙은행(BOE)과 달리 유럽은 그동안 GDP의 2% 정도만 경기부양에 쓴 만큼 개입여력도 있고, 효과가 클 것이란 기대도 있다.

이와 관련, 머빈 킹 BOE 총재는 이날 “금융시장 안정성은 약화됐고 재정위기로 실물경제가 영향을 받고 있다”며 ECB를 압박했다. 킹 총재는 “일반적인 수준으로 자금을 제공해선(돈을 풀어선) 투자자들의 신뢰를 되찾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