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행가·탈세하는 부자들 빚…왜 우리가 책임?"
정치권에 대한 배신감…정부 리더십 부재로 개혁 이행 불안
"미래와 희망이 없다"…성난 민심

26일 저녁 아테네 도심 국회의사당 앞 신타그마 광장.

지난해 2월 국가부도 위기에 처음 몰렸을 당시 이곳에서 느꼈던 국민의 불안과 막연한 믿음의 교차는 없었다.

불안감에도 긴축안으로 위기를 타개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정치권에 대한 성난 배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테네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코스타스 씨(33)는 "빚 얻어서 공무원 임금 주고 연금 줬다는 정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돈, 은행들 지원하는 데 썼지, 국민에게 쓴 거 아니다. 정치인, 은행가, 탈세하는 자본가들 배만 불렸다"고 성토했다.

그는 이날 `우리는 아무런 빚도 없고, 아무것도 팔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갚지 않을 것'이라는 대형 현수막을 직접 만들어 광장 한편에서 들고 있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국민의회를 소집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코스타스 아브롤이디스(43) 씨는 동료와 함께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 시작한 서명운동에 벌써 수백명이 동참했다.

아브롤이디스 씨는 "시민모임인 `300인 모임'에서 긴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정부에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면서 "정부가 거절한 만큼 우리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 중대사항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국민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다른 국가들과 국제 투기꾼들의 시종이라고 그는 서슴없이 표현했다.

`정치인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취지의 현수막들이 광장 이곳저곳에 내걸려 있었다.

신타그마 광장에는 이날도 어김없이 시민이 모여들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시작된 시위가 30일째 이어진 이 광장을 그리스 일각에선 `하원'이라고 한다.

줄어든 월급과 연금, 점점 쪼그라드는 생활, 무엇보다 희망없는 미래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커피숍 종업원, 회계사 사무실 임시직, 가전제품 매장 판매원, 음료업체 영업담당 등을 전전하다 8개월 전 실직한 안드레아스 씨(27)는 "예전에 실직했을 때 한 달에 400유로의 실업급여를 받았었는데 지금은 고용기간이 부족해 그나마 실업급여도 못 받고 있다. 일거리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층의 일자리가 없다. 보름 전 인터뷰를 했는데 담당자가 `당신 아니라도 일하려는 사람 많다'는 식으로 대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아테네에서 5시간 떨어진 제3대 도시 파트라에서 매일 올라와 15일째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정치인 때문만은 아니다. 외국자본이 들어와 이익만 챙기고 그리스 경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극히 일부만 부자가 됐다"며 "유로화를 버리고 드라크마(그리스 옛 통화)로 돌아가 가격 경쟁력을 키워야 일자리가 생긴다"고 역설했다.

명문 아테네공대에 재학 중인 아리스 군(24) 역시 "소수 가진 자들의 빚을 국민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들 때문에 우리 미래가 담보로 잡히는 건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학생들이 취업을 걱정하고 있고, 설령 취업하더라도 나중에 연금이나 건강보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광장에서 접한 민심은 "정치인들과 일부 부자들 때문에 생긴 문제를 나는 책임질 이유가 없다. 긴축안 반대는 물론 지금의 정치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대안은 나중의 문제라는 태도였다.

"지금은 개인적, 집단적인 책임감과 개혁 추진에 대한 정치적 의지가 필요한 때"라는 일간지 카티메리니 칼럼니스트의 지적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살라밤시 엘레니 씨(53)는 "정부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우리는 정부 여당을 뽑아준 책임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이번 주 국회의사당에서는 그리스의 운명을 가를 법안, `중기 재정 전략(MFST)'을 표결한다.

그리스는 물론 유로존, 나아가 온 세계가 긴장감 속에서 지켜볼 것이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가 법안 통과를 지난해 제공키로 약속한 구제금융 중 5차분(120억유로)과 추가 지원을 제공하는 전제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세 부담은 늘리는 대신 씀씀이는 줄여 5년간 국내총생산 대비 10%를 넘는 280억유로를 절감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한편 국유자산을 매각함으로써 500억유로를 확보, 빚을 줄인다는 계산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그리스는 디폴트(채무불이행) 벼랑 끝에 몰린다.

의회는 의사당 밖에서 뿜어나오는 시위대의 분노 속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중기 재정 계획이 통과되더라도 심각한 지경에 빠진 정부의 리더십 부재는 경제에 새로운 성장 요인들을 가져오고, 재정 위기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개혁 이행에 암울한 전망을 드리우고 있다.

그리스 재정 위기는 구제금융만으로는 해결될 유동성 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문제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없고 내국 법인도 국외에 투자하는 판이다.

빚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고, 관료주의와 공공부문의 부패와 비효율은 발전을 가로막는다.

탈세는 만연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세정에 옭매여 있다.

여론조사업체 ALCO의 분석가 코스타스 파나고풀로스는 최근 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에 많은 불일치와 분노가 존재한다. 희망이 없다. 새 내각은 희망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안정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테네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jungw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