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산책] 동서양 조형원리 절묘한 결합 뒤로 팽팽한 긴장감이…
프랑스인들만큼 일본 문화에 대해 열렬한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오늘도 에펠탑 부근에 있는 일본문화원에는 동방의 이국문화를 체험하려는 프랑스 젊은이들로 넘치며 스시 레스토랑과 라면집이 밀집한 오페라역 일대는 평일에도 일본 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프랑스인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즐기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적 자양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갔다. '자포니즘(일본주의)'으로 불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예술 전반에 걸친 수용은 물론이고 일본의 음식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담백한 맛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누벨 퀴진느(새로운 요리)'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런 일본 문화에 대한 열광은 한계에 부딪친 서구문화,서구예술의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뿌리를 캐보면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자들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중에서도 클로드 모네가 맏형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모네는 바게트 살 돈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일본 판화를 닥치는 대로 수집한 19세기판 '된장남'이었다.

그가 일본 판화 수집에 열을 올린 것은 단순히 자신의 시각적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판화 속에서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미술의 단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생트-아드레스의 테라스'는 그런 모네의 일본 미술에 대한 태도가 집약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1867년 모네는 노르망디 해안의 작은 마을 생트-아드레스(Sainte-Adresse)의 친척집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이 작품은 그때 그린 작품 중 한 점이다. 생트-아드레스는 르아브르 북쪽에 인접한 인구 8000명의 작은 마을.오래전부터 휴양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모네는 부친 등 가족과 함께 이곳에 왔지만 자신의 모델인 카미유 동슈와의 결혼문제로 가족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몰이해로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생트-아드레스의 테라스'는 크게 하늘과 바다를 그린 상단과 테라스의 정경을 그린 하단으로 나뉜다. 바다 위에는 각양각색의 배들이 떠 있고 수평선 왼쪽으로 옹플뢰르가 보인다. 하늘과 바다는 밝은 빛으로 충만해 있고 수면 위에는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하단의 테라스에는 네 명의 인물이 한낮의 태양 아래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수면 부근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왼쪽이 모네의 사촌인 잔 마르게리트이고 오른쪽 신사는 고모부인 아돌프 르카드르 박사다.

화면 앞쪽에는 역시 사촌인 소피와 모네의 아버지 아돌프 모네가 의자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테라스에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키 작은 관상수들이 다소 거친 붓의 터치로 묘사돼 있다. 꽃봉오리들을 밝게 빛나는 둥그런 색점으로 표현해 빛에 반사된 대상의 순간적 인상을 중시하는 인상주의의 회화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빛에 대한 집착은 테라스 가운데 바닥의 눈부신 흰색 면과 의자에 앉은 아버지의 모자와 소피의 양산을 흰색으로 처리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나타난 에도시대 일본 판화의 영향은 어떤 것일까. 먼저 화가의 시점이 서양화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조감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카유보트의 '트루빌의 붉은 빌라'(2010년 11월13일자 참조)를 얘기할 때 이미 운을 뗀 적이 있다. 화면을 난간을 기준으로 상하로 가른 구도도 일본 판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이다.

이 점은 에도시대 말기인 19세기 전반에 다색판화의 대가로 군림했던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36경' 중 '오백나한사(五百羅漢寺)'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분명해진다. 무엇보다도 모네의 그림은 화면을 평면적 색면으로 처리하는 일본 판화의 조형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화폭의 절반을 차지하는 하늘과 바다를 청색의 모노톤으로 표현한 점,테라스의 바닥을 흰색의 평면으로 처리한 점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네가 서양의 전통적 회화원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의 수파를 가까울수록 크게,멀수록 작게 묘사함으로써 원근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형 방식은 하단의 테라스 부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결국 이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의 조형원리가 긴밀하게 결합되었지만 한편으론 서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구도에 있어서도 모네는 바람에 펄럭이는 두 개의 깃발을 수직으로 배치함으로써 수평성에 치우친 가쓰시카의 작품과 달리 화면에 다이내믹한 운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모네는 일본 판화의 새로운 조형방식과 순간적 인상을 중시하는 인상주의의 이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포획했던 것이다.

패기만만한 젊은 화가 모네의 이 새로운 작품은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뒤늦게 출품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네 자신이 이 작품을 엉뚱하게도 중국풍 회화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가쓰시카의 작품을 너무 비슷하게 흉내낸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가쓰시카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서양 미술의 화합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다. 모네는 좀 더 솔직했어야 했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