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법이 시행된 지 만 2년이 지났다. 금융시장의 틀을 바꾸는 큰 변화를 대과 없이 정착시켰다는 평가다. 하지만 글로벌 수준의 투자은행(IB)이 등장하고 금융 '빅뱅'이 시작될 것이라던 기대에 비하면 크게 부진한 성과다. 한국경제신문은 국내 IB들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는 기획시리즈를 게재한다.


기업공개(IPO)와 채권 발행 주관 · 인수는 IB업의 핵심이다. 자본시장법이 시행된 지난 2년간 IPO와 채권 발행 시장은 호황기를 누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주식 · 채권을 통한 기업들의 자금조달 규모는 126조원으로 사상 최대였고 작년에도 123조원으로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올해 역시 IPO와 채권 발행 시장은 호조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하지만 지난 2년간의 호황은 자본시장법보다 주가 상승과 금리 하락이라는 증시 여건이 맞물린 덕분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오히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규제 강화로 대형 IB 육성은 뒷전으로 밀린 채 경쟁만 치열해지고 시장은 더욱 혼탁해졌다는 지적이 많다. 증권사 업무 간 지나친 정보교류 차단장치(차이니스월)는 정상적인 영업활동까지 제한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양적 성장 속 수수료 덤핑 여전

올 IPO 시장은 사상 최대(10조1000억원)였던 지난해에는 못 미치지만 4조~5조원으로 예년 수준을 크게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회사채 시장도 금리 상승에 대비한 일부 선제적 발행 수요와 차환 발행이 맞물려 호황기를 이어갈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양적 성장과 달리 질적인 측면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진단이다. 2009년 11월 상장된 한국관광공사 자회사인 GKL의 인수수수료율는 공모금액의 0.01%였다. 3%와 3억원 중 큰 금액으로 하는 통상 수수료보다 턱없이 낮다. 감사원 감사를 의식한 나머지 공기업이 출혈경쟁을 조장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IPO 평균수수료율은 1%로 미국의 7%와 비교가 안 된다. 한 증권사 IB본부장은 "증권사는 실적에 급급해 울며 겨자 먹기로 수수료 입찰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며 "현재 민영화를 추진 중인 인천공항공사의 수수료율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나름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해외 기업 IPO조차 초창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대까지 떨어졌다.

다른 증권사 IPO 부장은 "대기업 IPO에서는 인수단에 들어갈 경우 수수료의 절반을 다른 딜을 통해 계열 증권사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토로했다. 채권 인수수수료는 상황이 더 심각해 인수금액의 0.2% 수준에 불과한 딜이 수두룩하다.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기업에 비해 증권사의 규모가 절대적으로 작아 협상력이 부족하다"며 "IPO나 채권 발행 과정에서 IB 간 역할에 큰 차이가 없는 것도 문제"라고 분석했다.

◆증권사 서비스 차별화로 승부해야

증권사들이 수수료 경쟁에서 벗어나 IPO나 채권 인수 과정에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를 위해 증권사들이 자기자본을 늘리고 국내외 네트워크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증권사들이 단순 중개업무에 그치지 않고 위험을 떠안고 인수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기엔 여전히 자기자본이 취약한 실정이다. 국내 5대 증권사 자기자본 규모는 대부분 2조원 안팎으로 미국 골드만삭스나 일본 노무라증권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네트워크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신 실장은 "지난해도 해외채권 발행 1~5위는 외국계 IB가 싹쓸이했다"며 "해외 네트워크가 부족해 국내 기업 관련 딜조차 소화가 힘든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정부나 공기업의 무리한 수수료 인하 요구도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계 전문가는 "공기업 관련 딜은 빛 좋은 개살구"라며 "주관사 선정에 있어 지나치게 높은 수수료 배점 기준은 개선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자본시장법에서도 이 같은 업계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정영채 우리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는 "현재 아무리 좋은 투자대상도 IPO 주관사는 IB본부 내에서는 자기자본으로 투자(PI)할 수 없다"며 "IB본부 내 PEF(사모투자펀드) 방식을 통한 투자는 허용하는 현실과 비교할 때 지나친 규제"라고 주장했다. 적어도 6개월 이상,비상장기업 투자는 차이니스월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또 IPO 관계사의 공모주 청약 금지나 IB본부의 채권 유통물 매매 제한 등도 개정해야 할 조항으로 지목된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


◆ IB(투자은행)

investment bank.기업공개(IPO), 유상증자, 회사채 발행, 구조화 금융(structured finance),인수 · 합병(M&A) 등을 주관하고 자문하는 투자은행이나 투자은행 업무를 가리킨다. 주식 · 채권 등을 통해 장기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자(기업)와 자금 공급자인 투자자를 연결시키며, 자신의 돈을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기도 한다. 고객 예금을 받아 대출하는 일반 상업은행(commercial bank)과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