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과 마주한 서울 서초동 디에스홀빌딩.올해 창단 46주년을 맞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이 연주단을 이끌고 있는 김민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69)의 표정이 환하다. 1965년 창단 때 악장을 맡았던 그는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한국 최고 실내악단'의 이름표를 한 번도 떼지 않았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450여회의 연주를 통해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실내악단의 대명사로 키웠다. 특히 해외 연주 100회를 넘긴 기록은 나라 밖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직선 거리로 지구를 10바퀴 이상 돌았지요. 지난해 베이징에서 102회 연주회를 가졌고 올여름에는 유럽에서 103회 연주를 펼칠 겁니다. 8월 말부터 9월20일까지 루마니아와 이탈리아,프랑스에서 공연하는데 루마니아의 에네스코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더욱 기뻐요. 세계 정상들이 많이 오는 공연이고,프로그램도 전위적이죠.루마니아에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많습니다. 바이올린 스쿨도 유명하지요. 에네스코는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입니다. 에네스코 콩쿠르까지 있어요. 페스티벌 총감독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초청료도 많이 줬습니다. 루마니아 경제는 약할지 모르지만 음악은 세요. "


서울대 음대 졸업 후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한 그는 유학 당시의 연주 투어를 예로 들며 "우리가 하는 해외 투어는 유럽보다 몇 배 큰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유럽 음악가들은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기 쉽잖아요. 바로 옆에 붙어있으니까. 우리는 다르죠.한번 움직이려면 품이 많이 들고 거리도 엄청나고.독일에서도 연주 투어를 많이 했지만 버스 타고 다른 나라 도시에서 하고 금방 몇 개국 돌았거든요. "

그는 해외에 처음 나가던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생길 때에는 국내에 실내악의 개념도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첫 해외 공연이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땐 해외에 나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첫 번째가 일본 도쿄FM홀이었어요. 1987년 6월이었죠.일본에 귀화한 김창국 교수가 발벗고 도와줘서 성사됐습니다. 도쿄를 거쳐 미국 뉴욕의 머킨홀과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에서 공연했는데 현지 언론 리뷰에 큰 힘을 얻었지요. 현대자동차 엑셀이 미국에 수출되던 때였습니다. 그때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서양식 이름도 생겼어요. 코리안 체임버 앙상블이라고.바로크 시대 음악만 하는 것으로 오해할까봐 그렇게 붙였다고 하더군요. 이젠 코리안 체임버 앙상블(KCE)의 편성이 커져 코리안 체임버 오케스트라(KCO)가 됐습니다만."

1987년 연주회 때 초청료는 1000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3만달러를 넘는다. 워낙 열심히 하니까 세계 음악계에 소문이 나서 몸값이 30배나 뛴 것이다.

"독일 라인강 근처의 라인가우 페스티벌에는 세 번이나 초청을 받았습니다. 내후년에 또 갑니다. 핀란드에서도 세 번 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대통령 메달까지 받았죠.홍보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꾸준히 하니까 관심들을 갖더군요. 2000년에는 유엔본부에서 세계 명사들을 대상으로 5시간이나 공연했지요. "

내년에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연주할 예정이다. 그 다음에는 브라질 칠레 등 남미로 진출할 계획이다.

그는 "외국 공연에서 우리나라 곡을 많이 하고 싶은데 우리 실내악 곡은 윤이상 선생 곡 외에는 많지 않다"며 "앙코르를 항상 '경복궁 타령' 편곡으로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반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랄 정도'라고 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공연은 3년 전 크로아티아의 크레스 섬에 있는 절벽 꼭대기에서 한 음악회였다. "좁은 산길을 차로 올라가는데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무전기로 연락해서 미리 비켜주면서 참 힘들게 올라갔지요. 도착해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더군요. 800m 정도 절벽 위에 야외 무대가 있었고 바다가 내려다보였어요.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죠.누가 이런 곳에 오나 했는데 300~400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세서 악보가 날리기도 했지만 놀랍고도 감명 깊은 음악회였어요. 또 오라고 하는데,그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참….(웃음)"

그러나 진짜 감동적인 연주는 따로 있다고 했다. 2009년 소록도 공연이다. "나중에 영국 필하모닉이 찾아가서 더 유명해졌지만 우리가 먼저 했지요. 매우 복합적인 감동을 느꼈어요. 음악이라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얼마나 따뜻한 교감의 강물로 되살아나는지를 확인했다고 할까….듣는 사람이나 연주하는 사람이나 오래도록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

무산된 공연도 있다. 2009년 11월 백령도 공연을 추진했다가 신종플루 때문에 못한 것.떠나기 하루 전에 피아노까지 공수했지만 무산됐고 지난해 다시 추진했다가 이번엔 천안함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또 주저앉았다.

올해 일정도 빡빡하다. 이달 들어 신년음악회를 다섯 군데에서 열었고 오는 27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과 부산 소년의집 오케스트라의 신년맞이 나눔음악회'를 갖는다. 청소년음악회와 정기연주회도 정기적으로 펼친다.

3월에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10곡) 연주에 도전한다. "피아니스트 이대욱씨와 함께 10,17,24일 금호아트홀에서 함께하는데,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은 처음입니다. 바흐가 구약이라면 베토벤은 신약이죠.그만큼 음악사에서 영향력이 큽니다. 초기 작품부터 10번까지 음악적인 변화가 대단해요. 그 모든 과정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연주자로서 베토벤의 피아노나 바이올린 전곡을 연주하는 것도 의미있지요. 테크닉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음악의 깊이나 공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르잖아요. 나이 들어서 하는 것이라 더욱 느낌이 다릅니다. 젊을 때 읽은 문학작품과 지금의 것이 다르듯이."

이번 전곡 연주는 사흘 만에 끝내기 때문에 에너지나 집중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머리도 맑아야 해요. 베토벤은 곡을 굉장히 엄격하게 썼죠.그래서 연주자들이 두려워할 정도인데,조금이라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청중에게 제대로 감동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

그는 건강이 따라줘서 다행이라고 했다. "부속품이 좋은 편이죠(웃음).내일 모레면 일흔이지만 몸무게가 대학 때나 별 차이 없어요. 건강 관리법은 따로 없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일을 좋아하고 몰두하는 게 비결이랄까. 물론 과로는 피합니다. 너무 오버한다 싶으면 완전히 스톱하고 몇 시간이나 며칠씩 그냥 쉬어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거죠."

서울대 음대 학장을 세 번이나 지내고 정년퇴직했지만 그는 아직 '음악 정년'은 한참 멀었다고 했다. "머리가 맑지 않고 연주하기가 힘들어지면 그 때가 정년이죠.허허."

그는 예술적 기질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어머니가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생각이 트인 신여성이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의사였고.부모님이 예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저도 자유분방했지요. 늘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게 좋았어요. 요즘 생각해봐도 음악이란 건 백지에 시를 쓰는 것과 같다니까요. "

하지만 그의 꿈이 처음부터 음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윤이상 선생의 따님(윤정)이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인데 그분이 통영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지었다더군요. 뭐하러 거기에 집을 지었냐고 했더니 그림 그리려고 그랬다고 해요. 나도 작업실 하나 봐달라고 했죠.내 꿈이 그림 그리는 거니까. 그런데 그분은 성공했지만 저는 아직 시작도 못 했군요. 일이 너무 많아서.올해부터 서울국제음악제(5월15~30일) 감독도 맡아야 하고…."

평소 멋쟁이 소리를 자주 듣는 그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는 양복 상의에 꽂힌 행커치프다. 사진을 찍는 동안 물어봤더니 "집에 50개 정도 있는데 자주 쓰는 것은 5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만난사람=고두현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