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구조조정 대상 사업지구 명단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이지송 LH 사장은 29일 경영정상화 방안에 알맹이가 빠졌다는 지적에 대해 "대학입학시험 합격자 발표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전국이 시끄러울 텐데 어떻게 일일이 발표하느냐"고 반문했다. 발표 수위를 놓고 '되는 지구,안 되는 지구를 공개해 선을 긋고 새출발해야 한다'는 LH 측 입장과 '국민과 약속한 사업인데 일방적 포기 · 유예는 옳지 않고 엄청난 반발을 초래할 것'이라는 정부 측 의견이 첨예하게 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조정하지 않으면 경제 부담"

사업 구조조정은 'LH 경영정상화 방안'의 핵심이다. LH는 124조8000억원에 이르는 부채를 줄이기 위해 대규모 사업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사업조정 대상과 내용을 발표키로 했다. 명단을 발표하지 않으면 정치권 등에서 로비가 계속 들어와 정상적인 구조조정이 어렵고,하루 이자만 110억원을 물고 있는 LH의 경영정상화도 물건너 간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LH 관계자가 "정부가 국민과 한 약속은 지켜야 하지만 사업을 다 하려면 500조원이 들어가고 그러면 국민 경제에 큰 부담이 된다"며 사업 재조정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사업 구조조정은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통합 1주년인 9월 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11월로 연기됐다가 12월로 다시 늦춰졌고 구조조정 대상지구 이름 자체를 내놓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이명호 LH 사업조정심의실장은 "각 지구별로 해당 지방자치단체 및 주민과 협의를 벌여 사업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 일정 구조조정 변수되나

정치권에선 상당수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이 LH 사업 구조조정 발표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발표되면 다른 지역과 비교되고 사후 조정 가능성도 낮은 까닭이다. 여권 관계자는 "우리 지역구 의원의 무능으로 사업조정 대상이 타 지역보다 많다고 주민들이 생각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전했다.

보궐선거 총선 대선 등 선거일정이 내년부터 줄줄이 잡혀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 관계자는 "LH가 시행 중인 414개 사업지구는 전국에 걸쳐 있어 이해 당사자가 많다"며 "사업조정 대상지구 발표로 표심이 떠나는 것을 우려한 것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정부도 사업조정 일괄 발표를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불이익을 당하는 주민들이 한꺼번에 집단행동을 하며 반발하면 무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토지보상 등을 염두에 두고 금융권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사용한 사업지구 주민들은 그동안 LH 본사,해당 지역 LH지사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사업재원 15조원 줄였다지만

LH는 경영정상화 방안 발표에서 사업조정 기준과 원칙을 개략적으로만 제시했다. 연간 45조원 규모의 투자재원을 내년부터 30조원으로 15조원 감액,순차적으로 사업조정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체 414개 지구(593.4㎢) 가운데 보상을 마치고 착공한 212개(302㎢)는 토지나 아파트 분양이 순조롭지 않은 지구를 중심으로 사업비 투입을 늦추기로 했다.

보상을 마쳤지만 아직 착공하지 않은 64개(96㎢)에 대해선 지구별 여건에 따라 착공 연기 또는 분할 착공한다. 주변에 개발지구가 많거나 수요가 부족한 곳이 해당된다. 중장기적으로 주택수요 확보가 어려운 곳은 개발 방향을 재검토하거나 사업수지 개선방안을 마련한다.

보상이 시작되지 않은 138개 신규 사업지구에 대해선 구조조정에 나선다. 안성뉴타운처럼 개발 규모가 수요에 비해 과다한 곳은 규모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성남 대장지구,김제 순동지구처럼 LH가 인허가권자에게 지구지정을 제안했던 곳 중 상당수는 제안을 철회키로 했다.

부산 명동지구 등은 민간기업 지자체 등에 사업 시행권을 넘기기로 했다. 사실상 사업취소 대상으로 분류된 사업지구는 주민 의사에 따라 방향을 결정한다. 주민들이 원하면 지구지정에서 해제하고,계속 기다리겠다면 재무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사업을 장기 유보한다.

조성근 기자 tru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