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당시 우리은행 부동산금융팀장이었던 천모씨(47)는 펜션사업을 위해 강원도 평창에 사놨던 땅 잔금을 마련하지 못해 계약 해제 위기에 놓였다. 마침 서울 양재동 복합물류센터 '파이시티' 사업을 추진하는 B시행사 대표 이모씨(53)가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위해 천씨를 찾아왔다. 천씨는 1350억원의 PF를 성사시켜줬고,이씨는 대가로 대신 펜션 부지를 매입해주겠다며 토지대금 43억원에 '뇌물' 19억원을 더 얹은 통장을 비밀번호,도장과 함께 건넸다. 두 사람의 이 같은 '거래'는 2008년 말까지 거의 5년간 계속됐다.

우리은행 간부들이 부동산 시행업자들로부터 200억여원어치의 금품을 받고 대가로 1조4000억여원을 부당하게 대출한 사건이 경찰 수사로 드러났다. 해당 간부들이 은행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출을 밀어붙인 결과 우리은행은 수천억원을 떼일 위기에 놓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출 담당자 바꾸고 문서까지 조작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23일 배임증재와 횡령 등의 혐의로 B시행사 대표 이씨를 구속하고 공동대표 민모씨(58 · 중국인)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이씨 등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부정대출을 주도한 천씨와 후임 우리은행 부동산금융팀장 정모씨(47)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천씨 등은 금품 수수를 대가로 파이시티를 비롯해 지난해까지 B시행사가 추진하는 8건의 국내 · 외 부동산 개발사업에 1조4534억원의 PF대출을 해줬다. 천씨는 이 과정에서 현금 28억6000만원과 180억원 상당의 주식을,정씨는 현금 13억8700만원과 고급 골프회원권 등 금품을 받았다.

이들은 은행 내부의 대출 심사절차를 무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문서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은행 신탁사업단이 2007년 10월 실무협의회를 열고 B시행사가 추진하는 중국 오피스사업 관련 3800억원 PF 대출을 부결하자 천씨는 담당자를 교체한 후 다시 협의회를 열게 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위원 서명록을 위조하는 방법으로 전원 가결 의견을 받아내 대출을 성사시키고 이씨 등으로부터 200억원 가까운 금품을 챙겼다. 특수수사과 관계자는 "우리은행은 타은행과 달리 PF 대출 시 대형 건설사의 지급보증이나 관할 관청의 인허가 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 등 신탁사업단을 부실하게 운영했다"며 "아직까지 9723억원을 상환받지 못하고 있고 절반가량은 회수 불가능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800억원 횡령해 중국 고급 아파트 구입

이씨 등은 대출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해 PF사업 부실을 초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중국 오피스 빌딩 분양권을 인수하기 위해 회사로 하여금 1623억원을 홍콩 자회사에 입금하게 한 후 이 가운데 623억원을 현지 유령회사에 송금해 횡령했다. 이 가운데 72억원은 중국 고급 아파트 구입과 인테리어 비용에 쓰고 나머지는 국외로 도피시키거나 계열사 분식회계 등에 사용했다. 또 파이시티 대출 자금 가운데 80억여원을 빼돌리는 등 모두 800억여원을 횡령했다. 이 같은 횡령 등으로 파이시티 사업이 부실화돼 시공사인 대우자동차판매와 성우종합건설이 지난 4~6월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 경찰의 분석이다.

경찰은 PF 대출과정에서 은행 고위 간부도 특혜대출에 관여한 정황을 확인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또 신탁사업단을 통해 대출받은 또다른 시행사도 은행 간부들에게 분양권을 무상으로 공여하는 등 대가로 수천억원의 특혜 대출을 받은 의혹도 조사하고 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