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경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는 최근 각국의 5년 후 제조업 경쟁력을 평가한 결과물을 내놨다. 한국은 중국,인도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딜로이트가 한국의 강점으로 첫손에 꼽은 것은 주요 제조업 분야의 '수직 결합'이었다. 대기업이 깃발을 들면 각 분야에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선단(船團)'을 이뤄,라이벌들을 압도했다는 평가였다. 예컨대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에서 자국 1,2차 협력업체와 동반 진출한 기업은 현대 · 기아자동차뿐이다.

#2. 한국 경제의 미래와 관련,전문가들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자주 지적한다. 반도체,조선,철강,자동차 등 한국이 수위(首位)를 다투는 산업 분야가 10여년째 제자리 걸음이라는 얘기다. 조환익 KOTRA 사장은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기업들의 공이 가장 컸다"면서도 "향후 10년을 위해서는 한발 더 나아가 아이디어로 무장한 다양한 중소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 몇몇 스타급 선수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위기에는 강했지만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게 늘 약점으로 지적됐다. 올 상반기 총 수출액은 2215억달러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는 236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10.2%를 차지했을 정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다.

◆대 · 중소기업 '상생 DNA' 바뀌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100% 현금 결제 등 시혜성 지원이 많았다. 또 그 정도면 할 도리를 다했다는 인식도 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술 전수,교육 지원 등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협력업체인 PSK가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 특수가공 장비 애셔(Asher)를 국산화하고,세계 시장을 재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성전자가 핵심 부품 및 반도체 설비를 국산화하기 위해 협력업체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

삼성전자의 TV 디자인을 한단계 끌어오리며 세계 시장 1위를 굳건히 할 수 있게 해준 ToC (Touch of Color) 기술도 대표적인 협력의 결과물이다. 신흥정밀 세화전자 대덕전자부품 등 7개 사출 협력회사 및 에이테크솔루션,영신공업사,제일정공 등 3개 금형 협력회사와의 협력을 통해 삼성전자는 이중사출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포스코는 연구 · 개발(R&D) 인력 수급이 어렵고 고가의 연구장비 보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협력 중소기업의 기술 경쟁력 향상을 위해 2006년 9월 포스텍 · RIST 등 7개 연구기관과 함께 660여명의 기술자문단을 구성했다. 현재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모두 72개.연인원 4218명이 참여해 1763회의 기술 자문과 733회의 시험 분석을 지원했다. 올해부터는 자체 기술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건설 · 포스코특수강 · 포스코강판 등 5개 계열사도 자체적으로 테크노 파트너십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LG디스플레이 역시 올해 기술 지원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부품 공동 개발 등을 진행할 상생협력 대상 업체를 지난해 42개에서 올해 63개로 50% 늘렸다.

◆상생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

해외에서도 상생을 포함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경영이 주목받고 있다. 포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서 미국 대형 자동차업체 중 유일하게 구제금융을 받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포드의 힘'으로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꼽는다. 1차 협력업체에 대한 지원은 여느 기업과 같지만 이를 넘어서 2차 이하 협력사들에 대한 '혜택'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면서 실질적인 협력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올 6월 스위스 IMD 보고서에서 국가 경쟁력 부문 8위에 오르며 주목받았던 대만의 경쟁력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민호 KOTRA 타이베이 센터장은 "대만의 대기업들은 중소기업과 협력할 뿐 지배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철저하다"고 설명했다.

상생을 외면하고 독식의 함정에 빠지면서 실패를 경험한 기업들의 사례도 많다. 혁신의 대명사였던 모토로라가 추락한 것은 강압적인 태도로 통신사를 제멋대로 쥐고 흔든 오만함 때문이었다. 잘 나가던 맥도날드도 시장을 뿌리째 삼키기 위해 온 동네 구석구석에 가게를 늘리다 큰 곤욕을 치렀다. 상생과 발전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주우진 서울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과 달리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유럽과 일본의 대기업들은 협력업체들이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적정한 수준의 이익을 보장하거나 지원해준다"고 말했다. 제조업 경쟁력의 원천이 협력업체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발전해왔고 미래도 제조업에서 찾고 있다. 누가 누구의 적이 될지 모르는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대기업들이 빠르고 스마트한 협력업체를 진정한 파트너로 삼는 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조건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