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낙산사 근처 어딘가를 걷고 있다. 지난 18일 화진포에서 시작된'제1회 관동별곡 800리 세계슬로우 걷기축제'에 참가한 나는 나흘째 걷고 있고,토요일(10월24일) 오후 삼척의 죽서루에서 걷기를 마친다. 7박8일 동안 이름은'800리'지만,실제로는 113㎞,약 300리를 걷는다.

내가 이 걷기에 참가하게 된 것은 3년 반 전 경험한'밀포드 길(Milford Track)'의 황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뉴질랜드 남쪽에 있는 이 산길은 3박4일 동안 53.5㎞를 걷게 돼 있다. 하루 5-16.5-14-18㎞ 씩 의무적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키기 위해 뉴질랜드는 까다로운 규정을 만들고,이 지역이 훼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어 답사는 까다롭다.

3박은 간단한 산장 3곳에서 한다. 산장이래야 가스,수도,2층 침대와 화장실만 있고,전기는 밤 10시면 단전이다. 하루 40명만 입장시키기 때문에 산장에서는 무조건 하룻밤 자고 나면 길을 떠나야 한다. 또 3박4일 동안 자기 먹을 것,침낭,최소한의 갈아입을 옷 등 필수품은 각자 지고 가야 한다. 매일 15㎏ 이상을 지고 20㎞를 걸을 수 있어야 한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고생스러워 더욱 그럴지 모른다. 경치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우거진 숲과 물고기가 노는 개울이 이어지는 코스에는 580m의 서덜랜드폭포를 비롯한 수많은 실폭포도 즐비하다. 우리 일행이 사흘째 험난한 오르막을 올라 고도 1073m의 매키논관문(Mackinnon Pass)에 오르자 짙게 덮여 있던 안개가 슬그머니 걷히며 사방으로 높은 봉우리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풍광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밀포드 길'처럼 웅장하고도 변화무쌍하지는 않지만 우리 길은 또 그것대로 훌륭하고 아름답다. 게다가 우리의 역사와 전설과 꿈이 새겨져 있다. 꼭 2년 전 제주도에서'올레길'개발이 시작된 이후 우리나라에도 걷기가 열풍이 되어 번져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자기 고향의'올레길'개발에 열성이다. 내가 오늘 걷는 이 길도 송강 정철(1536~1593)의 시를 빌려 개발하고 있는 강원도의 올레길이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된 정철은 3월에 일대를 여행하고 가사 '관동별곡'을 지었다. 작가의 풍류와 국토 사랑을 유감없이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우리 국문학사의 대표작이다.

전국에서 일고 있는 올레길 개발이 우리 역사와 연계돼야 더욱 의미 있는 걷기 길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길의 개발을 너무 성급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이 걱정스럽다. 걷는 사람들의 편의만을 생각하자면 길목마다 이런저런 시설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설이 들어설 때마다 그만큼 우리의 자연은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고 있으니 조심할 일이 아닌가.

지난 5년 동안 나는 한 주일에 두 번 동네 산을 오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산이지만,그 변화가 아름답고도 기특하다. 그런데 우리 동네 등산로를 보면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여러 차례 손질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등산객들의 편의를 돕는 것은 기본이다. 동아줄로 계단 길을 보호하는 손잡이 망도 만들었고,이 대목 저 등성이마다 운동기구와 벤치도 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다. 전국이 모두 그렇게 등산로를 개발하고 있다.

케이블카는 이미 여러 곳에 등장했고 또 더 만들어질 모양이다. 이렇게 자꾸 등산로가 편해지다가는 등산로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날도 곧 올지 모른다는 걱정같지 않은 걱정이 앞선다. 자꾸 편해지기만 하는 세상이 꼭 축복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